자연의 섭리를 따라 조성한 한국식 정원, 죽설헌
정원을 가꾸는 것은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 인간은 자연 속에 집을 짓고, 또 삶터 가까이에 꽃과 나무를 심어 가꿔 왔는데, 이것이 지금의 정원 문화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인공 연못을 파고 거대한 괴석(怪石)을 가져다가 조성하는 중국이나, 나무와 바위를 인공적으로 다듬어 조성하는 일본과는 달리, 인공을 가미하면서도 손댄 것 같지 않은 자연미가 가장 큰 특징이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우리 정원의 특징이라면, 이러한 전통정원의 계보를 잇는 것이 바로 나주의 죽설헌(竹雪軒)이다.
죽설헌은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구릉지대의 약 사천 평(일만삼천 제곱미터) 대지에 수백 종의 자생 꽃과 토종 나무, 과실수와 화초 등이 우거져 있는 보기 드문 개인 정원이다. 이 원림(園林)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서구식 또는 일본식 정원과는 달리, 철저하게 자연의 섭리를 따라 조성한 토종 정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잔디를 까는 대신 키 작은 야생화들이 스스로 피어나도록 하고, 가지치기 등 인위적인 수형(樹形)의 변형을 추구하지 않고 자랄 수 있는 주변 환경만을 조성해 주는 등 최소한의 관리를 통해 한국식 정원을 구현하고 있다.
정원 주인은 화가 박태후(朴太候) 선생으로, 호남 원예고등학교에서 과수·채소·화훼 등에 관해 배우고 산야를 돌아다니며 각종 종자를 채취해 심고 가꾼 것이 사십여 년의 세월이 축적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책 『죽설헌 원림』은 그동안 꽃과 나무를 가꿔 온 이야기, 대숲이나 연못의 조성에 관한 경험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죽설헌의 삶 등에 관해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두었던 것을 모은 것으로, 저자의 한국식 정원관이 담겨 있는 에세이집이자, 우리 자생 식물 가꾸기에 관한 작은 도감이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침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특별한 ‘정원 가꾸기’의 기록
이 책은 죽설헌 정원 가꾸기의 기록으로, 봄, 여름, 가을.겨울, 그리고 죽설헌에서의 삶을 다룬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절기에 따라 피고 지는 꽃과 열매를 맺는 나무, 연못 조성과 그 주변의 조경, 그리고 죽설헌의 삶을 이루고 있는 여러 잔잔한 이야기들까지, 말 그대로 ‘자연 속에서의 삶’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응달진 북향 골짜기에는 아직 잔설이 있고 양지쪽 밭두둑에서는 새싹들이 기지개를 펴려고 할 즈음, 땅바닥에 쫙 깔린 포기에 연한 하늘색의 밥티만 한 작은 꽃들이 앙증맞게 무더기로 피어나,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면 소담스럽고 예쁘디예쁜 꽃들의 자태가 ‘아직 겨울이 다 지나간 것 같지 않은데 벌써 봄이 다가왔나’ 싶은 감흥을 뭉클하게 불러낸다.” 저자는 서문에서 “글 쓰는 재주는 영 젬병”이라고 말하지만, 봄까치꽃을 설명하는 첫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 “꽃이 진 꽃대 끝에는 왕방울만 한,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하얀 꽃씨 덩어리가 맺혀, 피어나는 노란 꽃들과 함께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다가, 꽃씨들이 미풍에 하나씩 낙하산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도 그만이다”라고 민들레의 매력을 표현하는 대목이나, “꽃이 지고 점점 사과 열매가 굵어지면서, 가지가 찢어지도록 늘어지는 광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병충해에 걸려 썩어 가다가 떨어져서 결국은 몇 알 남지 않아 겨우 맛이나 볼 정도밖에 되지 않더라도, 나무 아래 풀 속에 수북이 떨어져 썩어 가는 사과들도 놓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니, 어찌 정원에 사과나무를 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사과나무 예찬 등에서, 이 책 여기저기의 행간마다에서 자연과 함께해 온 사십여 년 경륜이 느껴진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같이 자연을 벗삼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나라 토종나무와 야생화들의 특징과 이를 제대로 가꾸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무엇을 심을 것인가가 핵심인데, 그는 그 지역 환경에 가장 적합한 수종, 자기가 좋아하는 수종, 가급적이면 유실수, 화초 대신 채소, 잡초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다년생 화초를 심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자연미를 위해 가급적 손대지 말고 자라는 대로 가만 놔두라고 한다.
실제로 죽설헌에서는 제비꽃, 민들레, 토끼풀, 질경이, 좀씀바귀, 양지꽃, 가락지나물, 뱀딸기, 주름조개풀 등 일부러 심지 않아도 자생하는 꽃들이 지천이고, 이들이 자연스런 조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복숭아, 사과, 자두, 앵두, 밤, 모과, 감 등 많은 유실수들이 자라는데, 유실수는 여느 꽃 못지않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하고, 열매도 선사하며, 열매로 인해 수많은 새들을 불러들이는 등 다양한 효과를 준다.
꽃과 나무 가꾸는 이야기 외에, 진돗개 키우기, 비닐하우스에서 사철 싱싱한 녹색 채소 기르기, 운치있는 벽난로를 손수 설치한 이야기, 오랜 세월 공들여 온 돌탑이나 고기왓장 담길 조성 등 죽설헌에서의 독특한 삶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죽설헌은 현재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평범한 개인이 가꾼 정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끔 하려는 저자의 배려로 인해서다. 갈수록 조경이 우리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오늘날, 전통정원의 맥을 이어 가려는 죽설헌의 정신을 담은 이 책은 한국정원의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