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71명의 작가, 98점의 이미지가 전하는
우리 미술이 품은 죽음, 위로와 성찰의 목소리
살아 있는 한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죽음’. 어떠한 삶을 누렸다 한들 단 한 번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미술은 오래전부터 깊이 천착해왔다. 죽음을 다루는 미술의 태도는 죽음 그리고 삶을 인식하는 당대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가족을 그리다』 『얼굴이 말하다』 등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그만의 농밀한 시선으로 조망해온 저자 박영택이 신간 『애도하는 미술』을 펴냈다. 마음산책에서 출간하는 여섯 번째 저서다. 그는 “죽음을 불러내고 그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기능이 미술 안에는 숨 쉬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보여주려는 미술은 결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이미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비극적인 조건 속에 놓여 있다. 그 안에서 미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애도’일 것이다. 애도의 시간은 우리에게 죽은 자들이 떠나고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과 성찰, 애도를 통해 삶을 더 존중하게 된다. 죽음을 불러내고 그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기능이 미술 안에는 숨 쉬고 있다. 애초에 미술은 애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책머리에」에서
『얼굴이 말하다』에서는 그림·사진·조각 작품 속 얼굴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과 욕망, 죽음, 문화, 사회에 얽힌 다양한 표정을 살폈고, 『식물성의 사유』에서는 식물성을 화두로 삼아 자연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박영택. 이번 『애도하는 미술』에서는 시신, 해골, 제사를 비롯한 14개의 주제를 통해 ‘죽음’이 지닌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이 책은 죽음을 다룬 미술 작품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독해”라는 말과 함께.
존재하면서 사라지는 역설의 시간……
이미지는 부재에 저항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망이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지레 내다봄으로써 죽음을 사유하고, 그
럼으로써 항시 죽음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드디어는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99쪽에서
삶은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인 바, 인간을 이해하고자 할 때 더 이상의 명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죽음의 수만큼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존재한다. 김명숙의 작품이 표상하는 “모든 인간이 최후로 간직한 얼굴”을 통해 죽음이 누구에게나 공평함을, 그와 같은 표정으로 삶에 종지부를 찍으리라는 것을 본다면 이원철의 작품으로는 남은 이들이 떠난 이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읽을 수 있다.
형식적으로 단순함과 간결함, 섬세함으로 직조된 이 사진에는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나무가 자리한다. 고분은 죽음, 나무는 삶을 상징할 것이다. 그 역도 가능하다. 죽은 이들은 저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확신 속에 무덤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영생과 불사, 불멸의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죽었을 것이고 그 믿음을 남은 이들이 무덤을 차려 공고히 했을 것이다. 무덤이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구분되는 일이자 죽음, 죽은 자를 영원히 기억하고 그 존재를 잊지 않겠다는 서약 같은 것이다.
-153, 156쪽에서
그러나 오로지 인간만이 죽음에 선택당하지는 않는다. 이우창은 물리적으로 더는 생장하지 못하는 꽃다발을 화폭 속에 걸어둠으로써 죽음이 불러오는 시간의 정지를 포착한다. 윤정미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자연사박물관을 “완벽한 무덤의 공간”이라 이야기하는데, 박제는 살아 있는 것을 애써 죽은 것으로 만든 다음 다시 여기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인간적’이다.
윤정미의 사진이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생명체들을 두서없이, 맥락 없이 재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빈약한 상상력과 허술한 솜씨로 죽음을 관리하
고 있는지를 말이다. 박제가 사물화한 사진이라면, 사진은 평평해진 박제다. 여기서 자연사박물관의 박제는 사진으로 고정되기 위해, 더 강하고 극적으로 정지되어 있다.
-200쪽에서
어느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곧 한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
죽음에 무심한 사회는 삶에도 무심하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죽음은, 어느 한 개인/개체의 소멸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실로서의 죽음이다. “역사와 문화는 그러한 죽음으로 촘촘히 직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미술이 바라보는 우리 현대사는 어떠할까. 해방과 전쟁, 분단에 이은 경제성장, 그리고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건과 의미로 점철된 숨 가쁜 역사다. 다시 말해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죽음으로 기술되었다.” 『애도하는 미술』은 우리 역사의 단면,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이 놓인 맥락을 미술을 통해 살핀다.
현대의 죽음은 그 시작부터 집단화한 죽음으로 기록된다. 집단적이면서 동시에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전쟁’과 ‘학살’의 비극적 역사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 집단적 죽임의 가해자나 원인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280쪽에서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에 속하는 남관은 작품에서 전쟁과 인간을 추상으로 엮어내며 “인간 드라마의 비참한 체험”을 그 자신의 예술의 실존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권순철은 전쟁에서 죽은 가족이나 친척의 죽음을 형상화한다. “그에게 그림은 망각과 싸우기 위한 절박한 행위다.”
한국전쟁을 겪어낸 모든 이들에게는 저마다 죽음에 대한 지독한 기억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을 치러낸 작가들의 작업에는 그 비극과 상처가 어떤 식으로든 스며들어 있다. 나로서는 바로 그러한 점이 한국 현대미술의 한 성격을 형성해왔다고 본다.
-285쪽에서
한편 그 죽음이 속한 사회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죽음도 있다. 이를테면 권정호는 대구 가스 폭발 사고나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을 다루며, 원치 않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이들을 다시 불러낸다. 그리고 받아들인다.
오늘날 물질적 삶에 연연하는 현대인에게 생의 타자로서의 죽음은 자신이 직면하기 전까지는 잊혀 있다. 그것은 망각과 외면, 회피 속에 놓여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이 치열한 삶의 경쟁력을 해치는 불필요한 과정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죽음은 공공연히 추방되고 억압된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권정호는 죽음을 다소 과잉으로 보여주고 반복해서 제시한다. 그의 해골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자 망각되고 있던 죽음을 매 순간, 지금 이 자리에 거듭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328쪽에서
박영택은 위에서 언급한 아리에스의 말을 받아 “우리가 죽음을 이해하고 정의하며 처리하는 방식 역시 항상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이라고 덧붙인다. 요컨대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곧 나와 우리, 나아가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최전선에는 항상 미술이 있었다. “애도는 상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는 자명한 이치 앞에서, 죽음을 응시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삶을 더욱 강하게 긍정하기. 이는 결국 애도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