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즐거운 학문이다
역사, 정말 고리타분한 암기 과목일 뿐인가
역사는 학창 시절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과목이다. 점점 시간이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학교는 최소한의 분량이나마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역사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입시에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암기해야 하는 양은 엄청난, 투자 대비 효과는 크지 않은 고역일 뿐이다.
역사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한다. 아이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왜?”라는 질문에 진땀 흘린 경험이 있는 어른들이라면 이 말이 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학교 입학 후 아이들은 마지못해 공부한다. “왜?”라는 물음도 점차 잦아든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어린이들의 호기심어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체 왜?
역사 읽기는 즐거워야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1872~1970)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쾌락으로서의 역사 읽기》에서 그것이 나쁜 교육 방법 때문이라고 답한다. 러셀의 말을 들어보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점수 따기 위주의 지긋지긋한 암기식 역사 교육이 행해진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하면 역사 교육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일반 학생들을 위한 학점 따기 위주의 개론. 중·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암기 위주다. 다른 하나는 평생 역사 연구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역사 전공자들을 상대로 한 강의. 이 교육에서 비전문가인 독서 대중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들만의 리그”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러셀이 제시하는 문제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역사 읽기의 즐거움을 되살리는 것이다. 예컨대 셰익스피어를 보자. 그는 기쁨을 주기 위해 글을 썼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셰익스피어에게 기쁨을 느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를 즐길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만 들어도 신물이 날 정도로 그의 작품 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독이자 학생들의 인격에 대한 무례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 읽기를 강요하면서 몇몇 역사적 사건의 연도와 몇몇 유명인의 이름 외우기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자 학생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다.
쾌락으로서의 역사 읽기를 위해
최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발간한 《기획회의》에서 ‘한국의 저자 3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옮긴이 박상익은 러셀의 이 같은 문제제기와 나름의 대안 제시를 오롯이 우리말로 옮기면서 역사 교육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운다. 러셀이 꼬집은 반세기 전 영국의 역사 교육을 보라. 지금 우리의 교육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이는 러셀의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유의미할 수 있는 이유다.
비록 출세나 승진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는 많은 효용이 있다. 흙탕물처럼 혼돈스러운 우리네 현실에서 역사적 시야는 무엇이 더 영속적이고 중요한 것인지를 판별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 읽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와 통찰이 고리타분한 암기 강요로 인해 묻힌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러셀이 ‘쾌락으로서의 역사 읽기’를 강조한 것은 역사 읽기의 이 같은 효용 때문이다. 그럼, 러셀이 안내하는 역사 읽기의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역사,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러셀은 역사를 읽는 방법을 큰 틀에서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로 나눈다. 러셀에 따르면, 역사에는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가 있다. 두 종류의 역사는 모두 가치를 갖고 있다. 거시적 역사는 어떻게 세계가 오늘의 세계로 발전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미시적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게 해주며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켜준다. 그렇다면 러셀이 말하는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사인가?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거시적 역사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처음 맞닥뜨리는, 그렇지만 쉽사리 답을 내기 어려운 근원적 질문이다. 러셀은 거시적 역사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한다. 거시적 역사는 먼저 태양에서 행성들이 분리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나일 계곡과 바빌로니아에서의 농경 생활과 같은 문명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러셀은 여기까지의 역사, 즉 기록된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까지를 어린이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나 그림을 보면서 해설을 곁들이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거시적 역사를 읽을 때 유의할 점도 잊지 않는다. 러셀은 거시적 역사를 쓰는 일부 역사가가 역사의 “철학”을 논증하려는 욕망을 느낀 나머지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는 특정 공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며 비판한다. 과연 역사 발전 공식이 있는 것일까? 세계는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것들은 많다. 하지만 사실의 절반 이상을 생략하고 잘라냄으로써만 만들어지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역사의 공식을 배워서는 곤란하다. 역사철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신화 작가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로 간주하고 멀리해야 한다.
러셀은 이 같은 역사철학 말고 역사가 수행할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기능이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겸손한 일반화를 통해 (역사철학과 반대되는) 역사 과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물 연구를 통해 “드라마나 서사시의 장점”을 “진실”이라는 장점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두 타입의 역사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은 양극으로 갈라진다. 전자는 인간을 객관적으로, 마치 천문학자가 천체를 대하듯 바라본다. 후자는 상상력에 호소하며, 마치 숙련된 기수에게 말에 관한 지식을 전수하듯이 인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미시적 역사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시적 역사는 이러한 질문에 도움을 준다. 러셀은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게 해주며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켜준다는 점에서 미시적 역사가 역사 이해에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미시적 역사의 이해를 위해 러셀이 첫 번째로 제시하는 방법은 과거의 위대한 역사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이다. 부인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이 제대로 알아보게 하기 위해 부인의 벗은 몸을 신하가 몰래 볼 수 있도록 했다가 결국 부인과 그 신하에게 죽임을 당하는 허영심 많은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 이야기처럼, 역사의 무게와 엄숙함 때문이 사사로운 이야기를 수록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이는 법이 없었던 헤로도토스. 운명과 자만에 떼밀려 파멸적이되 수치스럽지 않은 종말을 맞이한 전형적 영웅과도 같았던 아테네를 세련되고 정밀하게 다뤘던 투키디데스. 완벽하고도 위엄 있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대단히 구체적인 인물들을 그렸던 플루타르코스. 거대한 사건에 대한 흐름에 대한 감각이 확고하고도 정확했던 에드워드 기번이 러셀이 추천하는 역사가들이다.
러셀은 여기에 덧붙여 전기와 회고록의 폭넓은 섭렵을 제안한다. 그것을 통해 역사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놀랍도록 신기한 일들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위인은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 위대해진다. 반면 가까이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우스꽝스러운 인물도 있다. 러셀은 전자의 예로 스피노자와 링컨을, 후자의 예로 나폴레옹을 든다. 나아가 독일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복수(제2차 세계대전)가 결혼식에 대리인을 내세우고는 황후와의 정사를 즐기기에 바빴던 나폴레옹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역사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채 군사 정복자에 대한 찬양과 초인에 대한 숭배열 고조에만 열을 올린 탓이라고 비판한다.
러셀은 매우 다른 타입의 위인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놀라운 일이라며 추천한다. 사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