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독교인이다’라는 언명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먹은
허깨비들의 장송곡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독창적이고 농밀한 시선으로 한국 사회의 풍경을
속속들이 깨단했던 철학자 김영민의 본격 기독교 비평
7년째 십이조十二祖를 드리는 옹골지게 독실한 교회 재무부장 A, 남편과 부모의 사랑을 대신하는 기독교에 푹 빠진 B, 성서 강의가 끝나면 꼬리곰탕을 먹고 유흥가로 향하는 목사 C … 집사들끼리의 동호회를 이끌며 잃었던 삶의 재미를 찾는 h 등 각양각색의 에피소드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갖는 의미를 세밀하게 되묻다
이 책의 출간 의의
『봄날은 간다』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영화인문학』 『동무론』등 다수의 책을 통해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독창적인 관점과 문체를 고수해온 철학자 김영민이 이번에는 한국 기독교를 건드렸다. 이 책은 김영민이 2011년 월간 『기독교 사상』에 연재한 글을 묶어 새롭게 재구성한 것으로, 저자는 글 속에 등장하는 사실과 허구가 섞인 열 명의 신자의 삶에 들어가 변질되어버린 기독교적 가치를 짚어내고 회복해야 할 진정한 종교적 삶은 무엇인지를 톺아본다.
에피소드 소개
(1) 낙타의 길: 당신들의 기독교, 예수를 향한 나아감이 없는 습관으로 가득찬 독실함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공부를 매개로 모종의 신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제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뒤에 그제야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탓에 신학은 애초 그 정당성(legitimacy)이 의심스러운 신념을 정당화(justification)하는 장치로서 동원되곤 한다. 이 때문에 믿지 않고는 사유(공부)할 수 없는 한국 신학의 독특한 풍경이 연출된다.”(11~12쪽)
A는 지난 10년간 한 차례도 주일 대예배에 빠진 적이 없으며, 40대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십일조가 성에 차지 않아 ‘십이조’를 한 지 7년째 접어든 독실한 신앙인이다. 저자는 A의 이러한 독실함에 의문을 품으면서 이는 습관의 상식에 의해 나타난 일종의 노동이 아닌가 묻는다. 그러면서 신앙의 생성 과정에서 말씀의 종교라는 기독교에서 신념이 융통되는 방식이란 정작 언어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것이 앞서 있음을 질책하며 신앙의 맹목성을 꼬집는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론의 노동 없이 이루어진 생활의 관성이 보수주의를 만드는 과정은 곧, 신앙의 보수주의 형성에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는 특히 예수를 향한 신앙을 키우기 위한 노력 없는 세태를 비판하며, 죄와 은혜의 관계 속에서 “은혜를 받기 위함이라면 차라리 죄라도 좋다”는 식의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도착적 신자들이 문제임을 강변한다.
(2) 울고 있는 아이 혹은 증상의 미래: 당신들의 기독교, 풍진 세속을 견딜 사랑의 환상
“합리적이고 다감한 치유의 언어가 빈약한 사회에서, ‘성도의 사랑’이라는 어휘를 남발하면서, ‘외롭고 괴로운 이들은 다 내개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달콤하게 속살거리는 미남자-그것이 금발의 예수든, 혹은 남성적 카리스마로 넘실대는 부흥사든!-가 주재하는 종교는, 두 명의 부모와 두 명의 남편에게 인정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채 세속의 각질과 곡절에 내던져진 B의 심혼을 단번에 휘어잡았다.”(27쪽)
B는 교회 권사에 봉사부장까지 맡아 충량하고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70대의 노파다. B에게는 빨치산이었던 과거가 드러나 제대로 연을 맺지 못했던 첫 번째 남편, 시골 부호의 외아들이자 인텔리였지만 숨겨놓은 중병 걸린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후 파경을 맞은 두 번째 남편, 그리고 유달리 사랑과 배려로 서로 안아주지 못한 부모까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B는 40대 후반에 들어 교회생활을 시작하며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실감나게 주고받았고, “욕망의 상대를 부모나 남편 대신 신이라는 환상적 대상선택(Objektwahl)으로 교체”(31쪽)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B의 삶을 분석하며 B에게 종교란 “부재했던 사랑에 대한 보상적 환상이 집결하는 장소”(31쪽)였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신앙생활이 20세기 한국사의 풍진 세속에서 대표적으로 불행했던 한 여인에게 가능했던 마지막 형식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3) 룸살롱의 목사들: 당신들의 기독교, 사이비와 가장 멀다고 느낄 때 가장 사이비적인
“‘목사’요 교수라는 사회적 기표를 페르소나로 삼아 살아오면서 어렵사리 숨기고 억압해야만 했던 어떤 욕동(Trieb)은 이 수컷 동아리의 패거리 의식 속에 순발력 있게 추진(Trieb-en)된다. (…) 기업가의 삶이 기획이듯이, 그들의 삶은 ‘추진’이다. 그리고 오입(悟入)의 칸트와 오입(誤入)의 사드 사이를 왕래하는 이 목사들의 순례처는 이스라엘의 어느 곳이나 사회적 소외자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강남의 환락가다.”(36~37쪽)
C는 특정 교회를 담임하지 않지만 틈틈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목사이자, 어느 유수한 서울 소재 대학에서 성서를 강의하는 성서학자다. 그는 한 주간의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동료들과 더불어 꼬리곰탕 같은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은 뒤 강남의 유흥가로 향한다. 저자는 소스타인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론을 통해 신의 말을 전하는(대리하는) 사람들의 지위와 그 행위에서 오는 타락을 설명하며, ‘지금 이 세상의 C(들)’이 제도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가장 그 제도의 사이비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가는 이유를 묻는다.
(4) D와 팔선녀: 당신들의 기독교, 신도들의 공상 속에 가벼이 재단되어질 누군가의 삶
“하지만 경천동지할 신비체험도 필경은 ‘사람의 무늬[人紋]’ 속에 스며든 한 겹이자 한 층일 터, 인간의 삶과 인간의 세상보다 길거나 진하진 못할 것이다. 일상 속의 사람들이, 그들의 어울림과 갈등이, 그리고 그 욕망과 희망이 없는 곳에서야 종교나 신비가 대체 무슨 소용이 닿겠는가?”(58~59쪽)
D는 여덟 명의 아가씨로 구성된 일종의 종교공동체인 ‘팔선녀’를 이끌었던 신자로, 교회 안에서 늘 화제의 대상이었다. 선녀들은 매일 교회의 으슥한 골방에 모여 기도와 찬송으로 밤을 샜고, 그러던 와중에 방언이나 통변의 은사 등으로 대변되던 신비체험을 자주 한다는 것을 비롯한 갖가지 소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이들의 행태를 신비화·우상화하는 추세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면서 급기야 목회상의 공식 지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저자는 점점 늘어가는 소문과 질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D와 친해지면서 그녀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낸다. 이 의미 읽기는 무엇보다 ‘음탕해 보인다’라는 주변인들의 시선 가운데, 이른바 신화와 스캔들 사이에서 갇혀버린 여신도 D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면서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5) 국수 먹는 예수: 당신들의 기독교, ‘믿기’를 넘어 ‘하기’를 실천하는 이들의 지는 싸움과 그 희망
“어쨌든 한국의 개신교 교회는 그 배타적 독선주의와 더불어, 선교지상주의에 따른 무장소성(placelessness)으로 악명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특한 수행의 전통을 쟁이고 두른 채 오랫동안 산중에서 그 나름의 장소적 아우라를 계승해온 불교 사찰과는 아예 비교할 수도 없지만, 천주교나 원불교 등과 비교하더라도 개신교 교회당의 장소는 한국의 압축·편파·이식 근대화와 꼭 닮아 있어, 작으면 졸속하고 크면 부박하기 일쑤다.”(58~59쪽)
E는 어느 산골 교회에서 부목사 겸 교육전도사로 일하며 향촌의 땅을 지켜온 노인들을 교인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의 강의를 청강하는 수준을 넘어 깊은 지적 열의로 제자를 넘어 동무가 된 E와의 사연을 소개하며, 그의 내면적 성실성에 깃든 예수의 삶에 동참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태도에 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