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 Novel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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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들> <투견>의 작가 김숨의 두 번째 장편소설. '철'로 상징된 산업사회 이면의 어두운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날이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야 했던, 철저하게 이용되다가 마모되어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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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프롤로그 철 에필로그 해설 철의 시대를 기억하라·소영현 작가의 말

Description

철에 장악된, 지난날의 녹슬어버린 자화상 얼굴 없는 다수, 익명의 그들의 삶이 마모되어간다 아주 천천히…… 다시 한 번, 작가 김숨이 불러들이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기억, <철> ‘철’로 상징된 산업사회 이면의 어두운 기억 한 페이지를 차근차근 적어 내려간 한 편의 소설이 2008년 끝자락에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가상의 마을, 그러나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때로는 잔혹한 우화로, 때로는 적나라한 리얼리즘 소설로 다가오는 이 작품은,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 없고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난날의 자화상이다. 이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과 여전히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첫번째 장편소설 <백치들>을 통해 70년대에 돈을 벌기 위해 멀리 중동의 모래사막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작가 김숨이, 두번째 장편소설 <철>로 나날이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야 했던, 철저하게 이용되다가 마모되어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그 시기의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불러내었다. 사막의 모래를 안고 돌아왔던 아버지가 이번엔 녹에 휩싸여 붉게 부식된 모습으로 다시금 독자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모래’라는 자연의 물질이 ‘철’이라는 인공의 물질로 바뀌었다는 것뿐 아니라, 이 작품은 이전의 <백치들>과 맥을 같이 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사뭇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접어든 후 ‘노동’의 변화와 더불어 일어난 생활의 변화, 그것이 갖는 의미, 또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이 두 작품을 ‘노동’에 대한, 혹은 ‘아버지 세대의 역사’에 대한 연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백치들>에서 <철>까지 작가의 시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선 제목에서부터 그 시선의 차이는 뚜렷이 드러난다. <백치들>이 ‘노동자,’ 즉 사람에 그 초점을 맞춘 제목이라면 <철>은 ‘노동’ 그 자체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백치’는 그 시대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라고 했던 작가의 말처럼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과 애틋함을 느낄 수 있었던 첫번째 장편과는 달리, <철>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철저한 유기체의 동력원”(소영현, 이후 인용은 모두 소영현의 작품 해설 중에서 발췌)으로 그려질 뿐이다. 하여 “노동에 관한 한 노동자들의 개별성은 찾아볼 수 없으며,” 관계에 의한 정보만이 그들 각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을 복원하는 소설에서 만나기 힘든” 김숨만의 방식으로, “개별성 없는 비주체로서의 그들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작가의 날카로운 면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노동자란 노동과 자본의 교환 구조를 원활하게 움직이게 하는 유기체 동력일 뿐이며, 여기서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노동의 연속일 뿐”이라는 작가의 시선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노동에 강박적으로 집착했으나 결국 노동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모습으로 전도된다. 『철』의 노동자들은 “결국 노동을 박탈당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유기체 동력원으로서의 역할을 폐기당하고, 소멸해간다.” 작가는 이 과정을 한 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긴 시간에 걸쳐 느리게 재생하고 있는데, 여기에 김숨 특유의 건조한 시선과 그로테스크한 장치들이 덧붙여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기억이 불그스름한 녹을 휘감고 그 앙상한 모습을 드러낸다. ‘모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이국에서의 노동을 백치가 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상상으로 그려내게 하지만, ‘철’은 작품 속에서 마을 노인들이 생니까지 뽑아가며 박아 넣은 쇠 틀니처럼, 우리에게 깊숙이 박혀서 녹슬어가는 노동과 삶의 이면을 더욱 핍진하게 그려내게 하는 것이다. 한편 ‘철’을 향한 마을의 광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꼽추는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소의 노동자가 되기 위해 타지에서 흘러든 꼽추는 등에 붙은 혹 때문에 조선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발관을 차리고 마을의 노인들을 상대로 쇠로 된 틀니를 박아 넣으며 많은 돈을 모으게 된다. 조선소 노동자가 아니기에 노동으로부터 박탈될 일도 없는 그는, 노동자들이 만드는 거대한 철선의 주인이 되려는 야망을 품는다. 하지만 조선소의 부족한 철을 모으기 위한 쇠 징발이 일어났을 때, 이발관으로 쇠 징발을 하러 온 노동자 김태식에 의해 혹에 쇠못이 박히고, 결국 그 쇠못의 녹으로 파상풍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그가 철선을 사기 위해 모아둔 돈도 철과 함께 부식되어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진다. ‘철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메시지를 더없이 따뜻한 이미지로 TV 속 CF에서 접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이 작품은 똑같은 메시지가 참으로 무시무시할 수도 있음을, 결국 그들이 믿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 뿐임을 잔혹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번 작품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소영현 씨는 이 작품이 가진 힘을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자본을 통한 물신화 과정과 자본주의 발전사 그리고 개별 도시의 운명에 관한 서늘한 진실을 그로테스크화한 장치들로 탈색화함으로써 김숨의 소설이 잡아채는 것은 결국 타자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그 시절의 존재들,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자기소외된 우리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친족의 얼굴 없는 삶이다. 김숨의 소설에서 형해화된 타자의 범주는 자본과 노동 그리고 계급의 문제로 짱짱하게 조여져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김숨의 소설이 이미 지나치게 낡은 것이 되어버린 리얼리즘의 갱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숨은 언젠가 거대한 선박이 만들어지고 있는 남쪽의 도시에서 일박을 했던 일을 떠올린다. 새벽에 숙소의 벽 너머에서 들리던 중년 남자의 울음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남자의 윽박지르는 소리. 다음 날 거대한 선박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위해 평생을 노동에 힘쓰는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 오로지 철선의 완성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다가 마모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작품을 쓰는 동안 무엇보다 그녀의 머릿속에 못처럼 박혔던 일개(一介)라는 낱말은 <철>에 등장한 조선소 노동자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일개일 뿐인, 세상의 모든 위대한 당신들께 이 소설을 바친다”는 작가의 말은, 끝내 철선의 실체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철>의 여운을 더욱 깊이 새기게 한다. ‘보잘것없는 한 낱’이라는 뜻의 일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우리는 지난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 김숨의 소설이 갖고 있는 작지만 너무도 분명한 독자와의 소통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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