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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재료, 다른 운명 40억 년 생명의 레시피가 만든 진화의 우연과 필연 나는 왜 나인가,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 나를 나답게 만든 레시피, 그리고 진화의 우연과 필연 다윈은 집단을 위해 자신의 번식을 기꺼이 희생하는 일벌이 진화론을 위협하는 사례라고 두려워했다. 다윈 이후 유전자의 존재를 알아챈 유전학자들은 이보다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동일한 유전자에서 이토록 다양한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인간은 인간으로, 초파리는 초파리로 변하는 것일까? 진화는 어떻게 수많은 표현형을 만들어내는 걸까? 유전자를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유전학자들은 그런 생성의 원리가 방대한 유전변이 덕분임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재료는 같아도 재료를 요리하는 레시피가 달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화라는 생명 프로그래머는 이런 레시피를 하나하나 창조적으로 누적해왔다. 이때 바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은 인간답게, 초파리는 초파리답게 태어난 것은 이 우주에서 필연적인 과정이었는가, 아니면 우연한 신의 장난이었는가?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흥미로운 사고실험 하나를 남겼다. 만약 생명 진화의 유구한 역사가 비디오테이프 속에 담겨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테이프를 되감아 재생한다면 과연 똑같은 역사가 펼쳐질까? 우리 인간이 또 다시 출현할까? 굴드는 ‘아니오’라고 답했다. 모든 생물의 생존과 멸종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조건이 같더라도 진화는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 것이다. 정말로 진화는 반복 불가능한 것인가? 젊은 생물학자 리처드 렌스키는 실험을 통해 진화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실제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1988년부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장기실험진화’가 그것이다. 진화를 실험한다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20년이 인간의 100만 년과 같은 대장균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렌스키는 대장균을 12개 부족으로 나눠 동일한 조건에서 진화시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특정 대장균 집단을 얼린 뒤 원하는 때에 다시 부활시키면 진화가 반복되는지 관찰했다. 대장균 12 지파는 진화의 우연과 필연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스트르산 대사의 진화다. 대장균 부족 중 ‘Ara-3’이라는 부족에서 일반적으로 대장균에서 볼 수 없는, 유산소 조건에서 시트르산을 영양분으로 활용하는 혁신이 일어났다. 왜 이런 일이 유독 Ara-3 부족에서만 일어났을까? 운 좋은 돌연변이 덕분이라면 순전히 ‘우연’이다. 그런데 렌스키 연구팀이 얼려서 보관 중인 Ara-3 부족의 혁신 이전 세대 대장균을 녹여 진화시켰을 때 시트르산 혁신은 빈번히 일어난다. 마치 ‘필연’인 것처럼 말이다. 현대 유전학은 이 우연과 필연의 절묘한 조합을 단일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됐다. 진화가 만들어놓은, 오직 세포만 읽을 수 있던 ‘생명의 레시피’을 레시피의 산물인 인간이 해석 가능하게 된 건 DNA 시퀀싱 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시트르산 활용의 혁신이 일어난 것은 바로 시트르산 운반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citT 유전자 돌연변이의 자연선택 덕분이었다. Ara-3 부족에서는 돌연변이로 citT 유전자의 수가 늘어나 있었고 이 유전자를 발현하는 것과 관련된 조절 모듈의 선택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장균을 얼려 진화의 테이프를 거꾸로 돌리는 실험에서 시트르산 혁신이 반복해서 일어났을 때는 하나같이 citT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선택되는 ‘필연’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물론 우연도 있었다. citT 유전자를 발현하는 조절 모듈은 다른 방식의 혁신도 가능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이지만 citT 유전자 발현이라는 혁신은 필연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화가 만들어낸 생명의 레시피를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가 생명에 대해 가진 관념적인 이분법을 넘어서게 한다. 우리는, 그리고 이 모든 생명은 완전한 우연도, 그렇다고 신에 의해 창조된 필연적 피조물도 아니다. 우연과 필연의 절묘한 배합을 통해 역동적으로 만들어진 합목적적인 존재다. 합목적적인 존재로서 생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진화적, 유전적 조건은 삶의 목적에 대해 말해주는가? 왜 인간은 초파리가 될 수 없는가, 왜 생명의 운명은 이리도 다양한가, 이 운명의 차이가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과학적 정보 전달을 넘어 인간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고민하는 젊은 과학자의 인문학적 사유가 담긴《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는 진화와 인간 본성이라는 주제에 한층 깊이를 더한다. 생명의 레시피를 편집하다 생명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향하여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눈부신 표현형의 세계는 말하자면 음식의 세계다. 유전학은 이 다채로운 음식이 단지 A, G, C, T라는 네 가지 기호로 작성된, 유전형이라는 레시피로 만들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생명이 무엇인지, 생명체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러나 이제 우리 인간은 생명의 보편적 언어를 발견해 생명 진화의 독자가 되었고, 이제는 직접 생명의 레시피를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작가이자 편집자로 거듭났다. 유전학자들은 직접 유전자를 통제해 발생을 조절하여 어떻게 배아가 인간으로, 초파리로, 예쁜꼬마선충으로, 수많은 다세포 생물로 발생할 수 있는지 알아냈다. ‘같은 DNA, 다른 표현형’이라는 발생의 패러독스를 레시피의 차이로 규명해낸 것이다. 유전학자들은 초파리에 더듬이에서 다리가 자라고, 날개가 두 쌍이 생기는 초파리 돌연변이를 유도하면서 각 기관이 발생할 때 발생을 조절하는 스위치 유전자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이 바로 모든 척추동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신체 구획을 만들어내는 혹스 유전자의 발견이었다. “혹스 유전자의 발견은 발생유전학자들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건이었다. (중략) 어떻게 생명 진화의 역사에 다른 형태들이 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유전학적 패러다임이 마련되게 된다. 마치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다양한 설계도가 있으면 3D 프린터로 수많은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형태의 다양성은 새로운 재료(유전자)의 출현 없이도 오래된 재료를 이용하는 새로운 설계도로부터 진화할 수 있다.”(153쪽) 오늘날은 유전학 르네상스 시대다. DNA를 분석하는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부터 크리스퍼 유전체 편집 기술까지 유전자를 편집하는 혁신적인 수단을 갖추어 같은 재료에서 어떻게 수많은 다른 운명이 탄생할 수 있는지 그 심오하고도 경이로운 과제를 풀고 있다. 이는 “우주탐사선이 포착한 창백한 푸른 점으로서의 지구가 우리가 살아가는 행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었듯 유전학 르네상스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DNA 속에 무엇이 들어있으며, 그것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빚어내는지)를 가져다줄 것이다.”(53쪽) 생명의 레시피를 읽는 것은 결국 인간 삶의 진보다 더 행복하고 정의로운 삶을 위한 유전학 생명의 레시피를 해독하고 운명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결국, 이 지구에서 유일하게 우주와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자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왜 병들고 노화하는가? 왜 사람마다 체격, 외모, 성격, 건강, 지능이 그토록 다른가?, 우리의 복잡한 뇌와 마음이라는 신비로운 현상은 어떻게 생겼는가, 왜 인간의 젠더는 그토록 다양한가. 현대 유전학은 이런 질문에 대해 집단적 규모의 유전적 분석을 통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더 올바르게 바꾸려면 어떤 고민이 필요한지 통찰을 제시한다. 유전학자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노화로 인한 퇴행성 질환을 정복하고자 무한히 애쓰고 있다. 노화와 질병 역시 레시피의 세계에 해당하는 유전자들의 변이에 일정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