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폭염
우리는 그러나 목숨 걸고 폭염을 무시하고 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은 정치적·구조적 실패를 의미한다
·폭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극복할 정치적 의지가 있느냐다
·폭염은 자연재해가 아닌 사회비극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폭염은 자연재해가 아닌 정치적 실패의 문제
1995년 시카고에서는 기온이 섭씨 41도까지 올라가는 폭염이 일주일간 지속돼 7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구급차는 모자랐고, 병원은 자리가 없어 환자를 거부했으며, 시민들은 갑자기 죽은 이웃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 일이 있기 전 무더위는 사회적 문제로 취급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폭염이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는 것도 아니고 홍수나 폭설처럼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희생자는 대부분 눈에 잘 띄지 않는 노인, 빈곤층, 1인 가구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현지 조사는 폭염 사망자들이 실려온 한 부검소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검시관들이 의학적 부검을 실시하는 동안, 그는 희생자들이 생전에 살았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에 이들의 생을 앗아간 단서가 돼줄 사회학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희생자들의 거주지는 하나같이 사회 취약계층이 모여 사는 아파트나 싸구려 호텔들이었다. 저자는 이들 지역에 머물며 수시로 현지 조사를 나갔고 차츰 안면을 트게 된 이웃들은 클라이넨버그와의 인터뷰에 응한다. 한편 그는 경찰 보고서를 분석하고, 시체안치소의 기록들을 파헤치며, 통계 분석을 하는 방법으로 이 사안을 깊숙이 파고든다.
이 조사는 오랜 기간 차분히, 여러 스펙트럼을 따라 이뤄졌고, 기존 사회학이 간과해 우리 시선에 붙잡히지 않았던 이들을 분석의 망으로 끌어들인다.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폭염에 의한 사망이 ‘사회 불평등’ 문제라고 진단 내린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결과만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공공재화를 잘못 다룬 정부의 문제이며, 기후변화에 대한 공학기술적 대처의 실패일뿐더러, 시민사회가 서로를 보살피지 못한 공동체 부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염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전적으로 몸이 약하고, 나이가 많고, 쓸쓸한, 혼자서 더위를 견뎌야 했던 이들이다. 이 점이 바로 사회학자가 기후 문제를 파고들게 된 계기다.
그러므로 폭염은 일종의 사회극이다. 그것은 미처 우리가 살고 죽는 조건을 드러낸다. 폭염으로 인해 공동체의 누군가가 사망했다면, 이런 사회적 조건을 조성하고 더위가 지나가기만 하면 이들의 죽음을 쉽게 잊히도록 만든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관습적으로 당연시하고 숨기려 했던 사회적 기반에 생긴 균열을 조사해야만 향후 이런 참사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에서 혼자, 가난하게, 늙어간다는 것
시카고 폭염의 피해 양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아무도 모르게 방에서 홀로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폭염으로 인해 수백 명이 고독사했고, 심지어 사망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발견된 이도 많았다. 홀로 죽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1인 가구, 노인, 빈곤층 등 사회의 취약계층이었다. 이들은 또한 유품을 찾아갈 친척이나 지인이 거의 없는 무연고자였다.
당시 미국 전역에서는 독거노인 수가 증가하고 있었고, 시카고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독거노인, 특히 남성 노인들은 인간관계가 매우 제한적이며, 사회적 접촉이 적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TV를 보며 지낸다. 가족과의 교류는 뜸하거나 아예 관계가 끊긴 경우가 많으며, 몸이 불편하여 외출을 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다. 더욱이 이들 대부분은 노인 임대주택이나 원룸주거시설에 살고 있는데, 대부분 냉방장치 등의 시설이 노후화되거나 부족하고 관리가 허술하며, 범죄의 위험 또한 높다.
시카고의 일부 원룸 호텔은 ‘인간 축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시설과 환경이 형편없었다. 노스이스트사이드 지역의 한 호텔은 합판을 사용해 건물을 재구획하여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의자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수백 가구를 수용했다. 외벽에는 창문이 몇 개 있고 층마다 비상구가 있었지만, 건물 내부의 환기구 역할은 거의 하지 못했고, 1층에 있는 어두침침한 로비에는 냉방장치가 없었다. 이러한 열악한 주거 환경은 취약계층 주민들을 더 심각한 사회적 고립으로 이끌고, 폭염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서로를 보살피지 않는 사회에서 산다면
저자가 현지 조사 때 만난 폴린 잰코위츠의 사연은 폭염 기간에 독거노인이 흔히 처할 수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폴린은 리틀빌리지 지역에 사는 여성 독거노인이다. 그녀는 1층보다 더 안전하다는 이유로 아파트 3층에 살고 있었고, 방에는 에어컨이 있었지만 낡아서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이웃은 낯설고, 몸은 불편하고, 거리에 혼자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에 그녀는 외출을 꺼렸다. 외출을 하지 않는 그녀에겐 정기적으로 통화하는 ‘전화 친구’와 텔레비전, 라디오 등이 일상의 낙이었다. 너무 더울 땐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해준 전화 친구 덕분에 폴린은 폭염 기간 중 가장 더웠던 날, 일찍 일어나 에어컨이 있는 동네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식료품점에서 더위를 식히고 신선한 과일을 산 폴린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문제였다. 집으로 가기 위해 그녀는 3층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을 올라 겨우 방에 도착한 그녀의 몸은 더위 때문에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손이 마비되고 붓기 시작하더니 곧 다른 부위로까지 번졌다. 바닥에 쓰러진 폴린은 겨우 일어나 머리를 물에 적시고 젖은 수건을 몸과 얼굴에 올린 후 선풍기를 쐬며 몸을 뉘였다. 가까스로 열을 식힌 그녀는 곧 몸을 회복했다.
폴린의 이야기는 범죄에 대한 두려움, 열악한 주거 환경, 불편한 몸, 갑작스런 위기에 도움을 줄 주변 사람의 부재 등 현대 도시에 사는 독거노인들이 폭염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폴린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수백 명의 시카고 노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폭염에 운명이 엇갈린 지역들
시카고의 노스론데일과 리틀빌리지는 서로 인접한 지역으로, 폭염 당시 유사한 위험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독거노인의 수와 빈곤층 노인의 수가 거의 동일했고, 폭염 당시의 기후 또한 유사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노스론데일과 리틀빌리지의 폭염 피해자 수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노스론데일은 폭염으로 19명이 사망한 반면, 리틀빌리지는 그 10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저자는 폭염 사망률에 영향을 미치는 장소 기반의 조건을 연구하기 위해 두 지역을 현지 조사해나간다.
우선 노스론데일 지역은 흥성했던 공업이 1950년대 이후 쇠퇴하면서 지역의 환경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버려진 건물과 공터, 폭력범죄, 낙후된 기반시설, 낮은 인구밀도, 가족의 분산 등 위험한 환경이 노스론데일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이러한 환경은 주민들의 유대관계와 지역 공동체의 역할을 약화시켰으며 주민들의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거리는 범죄의 위협 요소로 넘쳐나 주민들은 밖으로 나가길 꺼렸다. 지역의 낙후된 환경은 노인들에게 특히 더 위험했다. 깨진 인도와 삐걱거리는 계단, 조명이 없는 공터로 인해 노인들은 불안을 느꼈고 그 결과 거리에 자주 나가지 않았다.
이에 반해 리틀빌리지는 번화한 거리와 왕성한 상업활동, 밀집된 주거지역, 상대적으로 낮은 범죄율 등 비교적 안전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역 환경 안에서 리틀빌리지의 주민들은 사회적 접촉과 공공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었고, 노인들 또한 주변의 생활편의시설을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었다.
노스론데일 주민들이 거리의 위험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