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 교양서 시장의 주목할 만한 ‘사건’
: 북유럽 신화 교양서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3권 출간
2007년 출간된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2권은 한국 출판 시장에 중요한 사건을 일으켰다. 우선, 그리스 로마 신화에 심각할 정도로 편중되어 있던 신화 교양서 시장에서 낯선 북유럽 신화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해와 달 오누이 이야기를 우리 전래동화 〈해님 달님 이야기〉와 연결 짓는다거나, 영어 단어 Wednesday가 북유럽 신화 최고신 오딘의 다른 이름인 보탄(Wodan, Wotan)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북유럽 신화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게끔 해주었다.
또, 이전까지 몇몇 번역서가 전부였던 북유럽(게르만) 신화와 전설에 관한 교양서들을 물리치고 ‘북유럽 신화’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추천하는 책이 되었다. 후발 주자로 출발한 책이 당당히 분야 대표 도서가 된 데에는 ①우리 정서를 반영한 국내 작가의 저작이라는 점과 ②이전의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도판과 편집이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유럽 신화는 바그너의 대표적인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같은 서구 문학과 예술의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되었으며, 영화 〈반지의 제왕〉과 〈토르〉, 게임 〈라그나로크〉처럼 오늘날 문화산업의 콘텐츠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난쟁이와 앨프, 마법사와 용사가 등장하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만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북유럽 신화다. 이 오래된 이야기가 다양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까닭은 수천 년간 시험되고 다듬어지면서 그 영향력을 인정받은 강력한 이야기성과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는 이처럼 익숙하지만 낯선 북유럽 신화를 친절하고 친근하게 풀어낸 본격적인 북유럽 신화 교양서다. 1, 2권이 신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소개했다면, 이번에 출간된 3권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1부에서는 헬기, 지구르트 등 북유럽 신화의 주요 출전인 에다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소개하고, 2부에서는 게르만 영웅 전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기사 영웅들이 등장한다.
※ 지구르트에서 파르치팔까지, 욕망과 열정에 충실했던 영웅들의 전설
게르만 영웅 전설은 중세 기사 문학의 뿌리이며 유럽의 문화·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환생한 영웅의 이야기, 괴물과 영웅의 대결, 아름다운 여인과의 강렬한 로맨스 등 흥미롭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득 담은 게르만 영웅 전설은 바그너의 오페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영화나 문학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재탄생되며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는 대개 힘세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훌륭히 이겨내고,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할리우드 액션 영웅들의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조금 다르다. 때로는 나약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기도 한다. 결국 영웅도 욕망과 열정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일 뿐이며, 욕망과 열정을 얼마나 잘 통제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3권의 영웅들의 세계에는 두 가지 보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반지’와 ‘성배’다. 지구르트가 차지한 반지는 부를 끌어모으게 해주는 힘을 가진 보물이다. 즉, 물질적 탐욕을 상징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지의 원래 주인인 난쟁이 안드바리의 저주가 걸려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이 보물을 차지하고 싶어 안달하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성배는 권능과 고귀함의 상징이다. 해마다 정해진 날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성배에 축복을 내린다. 하느님에게서 직접 받은 권능이 성배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성배는 인간의 힘으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배가 적절한 인간을 골라서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배에게 선택되기 위해서는 겸손과 철저한 자기 수련이 필수적이다.
중세 시대에 정리된 북유럽 신화의 출전 《에다》는 기독교로 개종한 북방 시인들의 손으로 쓰였다. 이교가 된 북유럽 신들과 영웅들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한 존재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교의 보물인 반지는 부정적으로, 기독교의 보물인 성배는 긍정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성배의 기사들이 추구하는 명예 역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서려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욕망에 충실한, 그래서 때로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면을 보이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인 영웅들을 만날 수 있다.
※ 영웅의 통과의례, ‘원수 갚기’의 의미
게르만 세계에서 영웅의 입문 또는 통과의례로 흔히 등장하는 것이 ‘아버지 또는 친척을 죽인 원수 갚기’다. 대표적인 게르만 영웅 전설에 〈뵐중 가문 이야기〉가 있다. 뵐중 왕과 그의 아들들은 가우트족의 왕 지크가이르의 욕심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홀로 살아남은 뵐중의 아들 지그문트는 숲에 숨어 살며 기회를 엿보다 누이동생 지그니의 도움으로 지크가이르를 죽이고 아버지 뵐중의 원수를 갚는다. 또 지그문트의 아들 지구르트(지그프리트) 역시 아버지를 죽인 훈딩 왕에게 복수를 한 후에야 비로소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이는 영웅들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마침내 용감한 인물로 성장했음을 온 세상에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영웅은 꿈꾸는 사람이다.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실현하고자 하며, 조언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계발한다.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 때, 영웅은 비로소 자기완성을 이룬다.
저자는 이런 영웅들의 삶이 평범한 우리의 삶과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영웅이 아니라도 어린 시절이 끝나면 누구나 어른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존재증명을 해야 한다. 부모의 보호 속에서 살다가도 분리를 겪어야 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는 않더라도 한 사람의 성인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며, 배우자를 만나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영웅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는 이런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은 곧, 자기 삶의 길을 열심히 걸어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무수한 상상력과 이야깃거리로 우리를 유혹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내 안에 잠재된 용기와 열정을 발견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