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통제하는가?
니체에 따르면 도덕의 근본 개념 중 하나인 죄(Schuld)는 부채(Schulden)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나왔다. 이 이치는 우리가 주택을 사기 위해(주택대출), 대학을 가기 위해(학자금대출), 매일매일 삶을 위해(신용카드) 크고 작은 빚을 지는 순간 죄인이 된다는 사실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빚을 지는 순간 ‘부채’는 개인의 삶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내적?외적인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으며, ‘의무’, ‘죄책감’, ‘양심’ 등 개인적이며 도덕적인 부분까지 건드린다.
신자유주의는 부채를 통해 개인의 도덕과 양심, 일상 통제하며 그것이 개인의 자발인 선택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금융 권력들은 사람들을 ‘빚을 진 죄인’으로 세뇌시키는 데 여념이 없으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주체성을 잃고 ‘부채인간’으로 조립·?제조?생산된다. 신자유주의 시대, 부채인간들은 빚이라는 죄를 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에 복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이 책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대출과 은행〉·《자본》, 니체의 《도덕의 계보》,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을 통해 ‘부채인간’의 생산 과정을 보여준다. ‘부채인간’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착취와 억압 메커니즘을 드러내주는 핵심 키워드다.
‘부채인간’의 탄생
전통적인 경제학적 관념만으로는 부채와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을 분석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 즉 사회적인 것, 개인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모조리 경제적 효용가치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 원리가 바로 채무자-채권자 관계다. 그리고 ‘빚’이라는 ‘원죄’를 진 인간, 즉 ‘부채인간’의 형상이 여기서 생겨난다.
프랑스에서는 신생아 1명당 2만 2,000유로의 빚을 지고 태어나며, 한국에서는 2011년 가계 빚이 912조 원을 넘어섰다. 수치상 1인당 1,830만 원에 달하는 액수다. 이 액수는 줄어드는 인구와 맞물려 더욱 빠른 속도로 불어날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빚을 진 인간’은 채무자-채권자라는 관계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다. “빚을 갚으라”는 지상명령은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짓누른다.
공공의 영역으로 확대된 부채
개인이 노동자이든, 실업자이든, 소비자이든, 생산자이든, 은퇴자이든 상관없이 자본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이며 책임을 진 인간, 즉 ‘채무자’다. 개인 대출을 받은 적도, 그럴 자격조차 없는 사람조차 공공부채를 갚는 데 동원된다.
계속해서 커져가는 공공부채는 사회 전체를 채무자로 만든다. 엄청난 돈이 채무자로부터 채권자로 흘러들어 가는데, 채무자는 대부분 민중이며 부유층과 기업이 채권자의 자리는 차지하고 있다. 채무가 증세로 흡수되지 않는 한, 미래 세대까지 이 관계는 계속될 것이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로 인해 불평등은 심화되며, 신분의 차이는 점점 커진다.
국가 간에도 부채 메커니즘을 통한 주체성의 박탈, 죄책감, 불평등이 존재한다. 독일 언론은 그리스를 기생충, 게으른 죄인이라고 비난한다. 아일랜드는 EU와 IMF에 손을 벌림으로써 ‘공식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포기했다’.
부채에 관한 시각을 바꿔야 답을 찾을 수 있다
부채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부채에 관한 시각을 바꿔야 한다. 부채는 단순한 개인과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권력의 문제이며, 인식과 투쟁의 문제다. 부채는 단순히 돈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실존을 생산·통제하고 있다.
‘부채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를 횡단하는 새로운 연대, 새로운 협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빚을 갚거나 파산 신청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답이 되지 못한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부채의 담론, 부채의 도덕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