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워싱턴 포스트』, 『이코노미스트』, 『퍼블리셔스 위클리』 선정 2015년 올해의 책
새뮤얼 존슨상 파이널리스트
마크 린튼 역사상, 아서 로스 도서상 숏리스트
비극의 무대, <블랙 어스>
홀로코스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유례없는 비극에 대해 우리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의외로 빈약하다. 미치광이 히틀러와 전체주의 나치 독일, 반성 없이 임무를 수행한 관료와 산업화된 학살 시설 아우슈비츠 등이 전부다. 히틀러는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패색이 짙어가는 와중에도 왜 유대인 몰살에 골몰했을까? 이들 이미지에 따르면 답은 간단해 보인다.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인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 책 『블랙 어스Black Earth』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는 처음부터 히틀러의 마음속에 있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없애는 것은 지구의 생태학적 균형을 복원하고 독일인들을 다시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 세계관은 다른 국가를 파괴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었고,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유럽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 식민지 전쟁이었다. 즉, 스나이더는 2차 세계 대전을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제시한다. 독일인을 배불리 먹일 땅.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유대인을 보내 버릴 땅. 그리고 마침내 모든 유대인의 무덤이 된 땅. 그것이 바로 <블랙 어스>이다.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스나이더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가 히틀러나 나치와는 다르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히틀러의 세계에 더 가깝다. 『애틀랜틱』지의 편집장 제프리 골드버그가 평했듯이, <과거는 어쨌든 지나간 것이라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경고로 읽힐 것이다>.
히틀러의 세계
스나이더는 먼저 히틀러의 세계관을 분석한다. 히틀러는 지구를 종족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 세계는 정글이었고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종족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따라서, 모든 종족이 상생할 수 있다는 관념은 거짓이자 전염병이다. 그러한 관념을 퍼뜨려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바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비종족주의의 화신으로 보였다. 그들은 정주지가 없고 도처에서 눈에 띄었다. 전통에 도전하는 모든 사상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둘 다에서 유대인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히틀러가 보기에 유대인은 독일 종족의 파멸을 위해 비종족주의적 믿음을 조장하는 음모 세력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가 된다.
스나이더는 히틀러가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즉, 그가 독일의 승리에 모든 것을 건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히틀러는 독일 종족의 우수함을 믿었고, 독일이 마땅히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나이더가 강조하듯이, 히틀러가 믿은 유일한 진리는 정글의 법칙이었다. 독일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독일 종족이 그만큼 우수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독일은 마땅히 패배의 시련을 겪어야만 한다. 히틀러는 전후(1차 대전) 독일의 궁핍함을 미국의 풍족함과 비교했다. 독일이 미국만큼 풍족함을 누리려면 그 원천인 광활한 영토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에서 취할 것인가? 정복할 식민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이웃 유럽의 열등한 종족들의 영토가 히틀러의 눈에 들어왔다. 독일은 동유럽의 광활한 영토를 대상으로 식민지 전쟁을 벌였고, 그곳의 유럽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처럼 취급했다. 서구인들에게 이것은 미증유의 충격이었다.
유대인 해법, 이주 혹은 몰살
동유럽 영토는, 나아가 소련의 영토는 또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필요했다. 스나이더가 이 책에서 잘 보여 주듯이, 1930년대 말까지 독일은 폴란드와 함께 유대인 해법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유대인은 독일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했지만, 그것이 곧 몰살을 뜻하지는 않았다. 모두 죽일 필요는 없었다. 어딘가 먼,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보내 버리면 그만이었다. 독일이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인을 보는 즉시 모두 죽이지 않고 게토와 수용소를 만들어 살려 둔 이유는 최종적으로 그들을 어딘가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 <어딘가>는 한때 마다가스카르와 팔레스타인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시베리아 동토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히틀러는 마침내 유대인을 모두 죽이기로 한다.
<국가 없는> 지대의 국민
스나이더는 <이중 점령>과 <국가 없는 상태>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비극의 성격은 이 지점에서 극도로 복잡해진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라 동유럽을 양분해 침공한 독일과 소련은 각기 기존의 국가 제도를 파괴하고 지배 체제를 구축한다. 1941년, 독일이 동맹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기로 했을 때, 전선은 2년 전에 소련에 점령당했던 지역에 그어졌다. 이 지역은 소련에 의해 한번 파괴되었고, 독일에 의해 재차 파괴된다. 이것이 이른바 <이중 점령>이다. <이중 점령>은 국가의 흔적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독일은 이 지역에 국가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선언한다.
스나이더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가에 주목한다. 독일에 굴복했지만 국가 제도가 살아남은 곳, 이를테면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프랑스 같은 곳에서 유대인은 제약을 받을지언정 결코 함부로 체포되거나 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중 점령>을 당한 <국가 없는> 지대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부정당하고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이나 들소처럼 사냥을 당했다. 그들은 그곳을 무단 점거한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20세기 군국주의가 초래한 비극에서, 우리는 국가의 권한과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이 책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국가가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 국민은 언제든 손쉽게 사라질 수 있었다.
살인자와 구원자
유대인 절멸을 구상한 것은 히틀러이다. 그러나 그 실행자는 히틀러도 독일인도 아닌 경우가 많았다. 소련은 독일 이상의 유대인 학살자였다. 내무인민위원부의 만행은 이 책에 언급된 것만으로도 경악할 만하지만, 대부분 은폐되거나 조작되어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유대인 혐오는 어디에나 만연한 현상이었다. 독일 점령자들이 유대인을 탐욕스러운 자본가로, 혹은 소련의 앞잡이로 제시하자마자 점령지의 비유대인들은 기꺼이 유대인을 죽이고자 했다. 유대인의 재산을 차지하고 얼마 안 되는 보상을 받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밀고자, 살인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별다를 것 없는 이들이 때로 유대인을 구했다. 감시와 밀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구원자가 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일이었다. 때로는 돈이, 때로는 성적인 기대 따위가 유대인을 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등의 이유 없이> 유대인을 구했다. 스나이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