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는 새

최성각 · Novel
5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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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각 생태소설집. 최성각 소설가의 작품집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의 생태문학의 발전 면모를 톺아보는 일이자, 우리나라 환경 운동이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그는 오늘날 인류가 맞부딪힌 환경 위기나 생태계 파괴가 궁극적으로는 산업사회를 회의하지 않는 인류의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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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작가의 말 1부 단편소설 밤의 짜이 왕, 예스비 구룽 은행나무는 좋은 땔감이 아니다 강을 위한 미사 바퀴 저쪽에 육백마지기의 바람 2부 중편소설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 동강은 황새여울을 안고 흐른다 3부 엽편소설 강물은 흘러야 하고, 갯벌에는 갯것들 넘쳐야 사막의 우물 파는 인부 말의 감옥 해설: 한국 녹색문학의 현주소_ 김욱동 발표 지면

Description

한국 생태문학의 바로미터 최성각 생태소설집 출간! 생명 존엄은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성장주의, 경쟁과 속도, 상품 생산이 최우선시 되는 산업사회에서 삶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은 어려운 일이다. 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오로지 현재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이익에 골몰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치(數値)는 무역수지나 취득세와 같은 것들이지 멸종된 동물의 숫자나, 도시에 있는 텃밭의 개수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대부분의 공력을 개발을 위해 집중하고 있다. 국토개발, 산업개발, 인재개발…….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개발이란 언제나 기존의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짓거나 없던 것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것을 이식하는 방식을 취한다. 대부분의 개발이 물질적 개발에만 한정되어 있다. 강을 막고, 산을 뚫어, 콘크리트를 처바르는 것만이 개발인가. 아니다. 둑을 헐어 바다생물들이 놀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개발이고, 강물이 자유롭게 흘러 고이고 썩지 않게 하는 것도 개발이다. 환경을 인간을 위한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지금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아름다운 개발일 것이다. 지난 1990년대 초 상계동 쓰레기 소각장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환경운동에 투신한 최성각 소설가는 새나 돌멩이, 지렁이에게 환경상을 주는 ‘풀꽃평화연구소’를 만들고 ‘녹색’ 잡지를 발간하는 데 자문를 주면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다른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그러한 고민과 노력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소설들에는 상계동 소각장 사건은 물론, 새만금 개발, 지리산 댐 소동, 천성산의 도룡뇽 소송. 부안핵쓰레기장 사태, 사대강 개발 등 이 땅에서 벌어진 온갖 환경문제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는 그간의 자신의 문학 작품을 한자리에 갈무리하면서 출간한 『쫓기는 새』(실천문학사, 2013)에서 “내게 문명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서 고랑을 만들거나 풀을 뽑아 거름을 만드는 일이었다. 푸르고 어린 것들을 조심스럽게 심고 그것들이 자라는 것을 놀라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겨워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4대강이니 새만금이니 하면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짓밟고 있는 이 땅에서 그는 고랑을 만들고 거름을 만드는 것이 문명이라고 했다. 개발의 군홧발이 여전한 이 땅에서 그는 푸르고 어린 것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문명이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자연파괴를 우려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현실은 자연파괴에 대한 불감증을 가진 우리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일 것이다. 어쩌면 자연보다 우리 마음이 먼저 파괴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보면서 우리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생태계 위기의 해법은 인간관계의 회복에서 최성각 소설가의 작품집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의 생태문학의 발전 면모를 톺아보는 일이자, 우리나라 환경운동이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그는 오늘날 인류가 맞부딪힌 환경 위기나 생태계 파괴가 궁극적으로는 산업사회를 회의하지 않는 인류의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소비문화를 부추기고 이윤 추구를 지상 목표로 하는 사회에서 인류는 처참히 환경을 파괴해왔다. 그의 작품 「IMF 시대의 술꾼」에 등장하는 박 시인은 “우리 모두 미쳤었지요. 디립다 만들어대고 디립다 버려대고, 정신없이 잘난 척하고 살아왔죠”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인류는 무엇이든 많이 만들어 풍족하게 쓰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앞세워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가장 파괴적으로 치명적인 생명체로 거듭났다. 최성각 소설가는 환경 위기나 생태계 위기의 근본 원인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서 찾으려고 한다. 인류가 맞부딪히고 있는 심각한 환경 위기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그것과 궁극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강에서 온 편지」에서 그는 승근이라는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환경문제는 언제나 자연과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 내부의 탐욕과 부패, 무관심의 문제”라고 잘라 말한 바 있다. 그는 인간관계 또한 생태계에 속하는 하나의 범주하고 생각하며, 생태계 위기의 해결 방안도 결국 인간관계의 회복에 있다고 말한다. 소설 『바퀴 저쪽에』의 작중인물 진우는 강변도로를 달리다가 인도에 서 있는 노파를 발견한다. 위험에 처한 노파를 도와주려던 그는 하지만 자동차의 물결 속에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그는 “추위에 떠는 작은 들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보자기처럼 허옇게 펄럭”이는 노파의 모습이 눈에 들어간 티끌처럼 마음에 걸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터인데 그는 가까운 파출소를 찾아가 노파의 안전을 부탁한다. 이 일이 있기 몇 해 전에는 택시를 타고 친구의 결혼식에 가던 중 오토바이 사고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쳤다가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부상자를 다시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는 비단 ‘바퀴 이쪽에’ 있는 사람들, 즉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바퀴 저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관심과 배려는 「독방에 감금되었던 히말라야 여인」에서 좀 더 뚜렷이 엿볼 수 있다. 이른바 ‘찬드라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한국에 온 네팔 여성 찬드라 쿠마리 구룽이 병원과 시설의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실수로 서울시립부녀보호소를 거쳐 용인정신병원에서 무려 6년간 감금 생활을 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최씨 성을 가진 화자 ‘나’가 한국이라는 사회가 힘없는 이방인 찬드라에게 가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 여러 방법으로 “진실어린 사과와 위로”를 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성금을 모아 그녀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금보다 더 소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 진정으로 사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그가 종사하는 ‘풀꽃세상’이라는 단체의 게시판에는 찬드라에게 “참으로 미안합니다. 부디 히말라야같이 큰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글이 올라온다.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가? 최성각 소설가의 생태문학이 가장 잘 형상화된 작품으로 중편소설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삼십 대 중반의 “가슴이 뜨거운 허무주의자”는 뿌연 오줌과 목덜미를 적시는 땀 때문에 집 근처 유락산 약수터를 찾게 된다. 유락산 약수터를 찾은 첫날부터 그는 물을 두고 다투는 사람들과 산에서 개를 잡아먹는 사내들을 목격한다.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현실의 한 단면이었다. 연일 수돗물이 식수로 부적격하다는 기사가 신문 1면을 장식하는가 하면, 정부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서울 시민의 젖줄인 한강을 “거대한 뚜껑 없는 하수도”로 만들고 있었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붐비는 약수터 대신 유락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절 약사전(藥師殿)과 그 옆에 있는 광덕약수터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우연히 그곳에서 약사전 벽에 그려진 불화(佛畵)를 보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니, 뜰에 과일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과일나무가 서 있고 그 뒤쪽의 벼랑 너머 산에는 눈이 덮여 있는 것 같았다. 벼랑에 서 있는 단풍나무로 보아 만산홍엽을 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림 오른쪽에는 잿빛 벽돌을 쌓아 올린 누대에 곱게 머리를 빗어 올린 여인이 이불을 쓰고 앓아누워 있었다. 특이한 것은 여인의 오른쪽 손목과 뜰의 과일나무가 가느다란 흰 실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인공이 그 벽화를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실이 끊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 하얀 실은 그가 보기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