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어 ‘양자역학’을 마스터한 악당들
이 소설은 서두에 현대물리학의 두 거장,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의 말을 인용하면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이야기의 흐름이 범상치 않을 거라는 점을 예고한다.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듯이 보이는 시점에서 누구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다. 멀쩡한 사람들이 쉽사리 신흥종교나 도박을 탈출구로 삼는 이유일 것이다. 불꽃이 클수록 그 명암이 뚜렷하듯 화려한 삶을 산 사람들일수록 그러한 유혹에 깊이 빠진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한 자들의 운명은 쉬운 선택만큼이나 뻔하다.
그렇다면 현대물리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양자역학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은 인생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물론 과학적 진리를 인생의 진리로 삼는 행위는 엄연한 오류이며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미뤄두자.) 사실 이런 선택은 주인공들이 벌여왔던 소동만큼이나 엽기적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들을 보면 대충 이야기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통 크게도 한 번에 수십 톤의 마리화나를 배와 비행기를 가리지 않고 실어내는 밀매업자(화자), 가축에 해를 끼치는 재규어를 잡을 때도 대전차포를 들이대는 마약 군벌, 급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제트기를 몰아대는 베트남전의 탑건, 전직 미국 국무부 유망주이자 변호사였지만 급할 때면 언제나 수류탄을 까 던지는 로버트, 지금까지 태어난 개들 중에서 가장 마약 밀매에 열심인 개 하이 포케츠, 9mm 베레타 권총과 M16 소총을 구별할 줄 알며 따뜻한 총신을 감고 낮잠을 즐기는 귀여운 보아뱀 렉스 등등. 재밌는 사실은 등장인물들에 부여된 성격처럼 이 소설에는 수류탄과 비행기 추락, 총질이 난무하지만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으며, 매번 웃음을 증폭시키는 소재로 작용할 뿐이라는 거다.
<코스믹 반디토스>는 바이스베커의 처녀작이다. 1986년 첫 출간 당시 마땅한 매체를 찾지 못했던 이 책은 인터넷의 확산에 힘입어 마니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일약 ‘희귀본’의 반열에 들게 된다. 그 사이 지은이는 사라진 친구를 찾으러 남미를 헤메고 있었고, 독일에서는 이 책의 이름을 딴 <코스믹 반디토스>라는 록밴드가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구가하다가 2001년 마니아들의 성화로 재출간되었다. <코스믹 반디토스는> 재출간 즉시 일반의 화제에 올랐으며, 마침내 헐리웃의 배우이자 감독인 존 쿠삭이 나서서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다.(이 책의 후속격인 <In Search of Captain Zero>는 숀펜이 영화를 맡았다.)
마치 한 편의 로드 무비처럼 읽히는 작품
<코스믹 반디토스>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특이한 줄거리, 독자를 키득거리게 유발하는 유머, 장르를 정하기 힘들게 만드는 소재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3가지의 커다란 요소, 과거.현재.미래를 바쁘게 오가는 내러티브 구조, 슬랩스틱 코미디언들 같은 등장인물들, 현대 과학 지식의 단편이 잘 버무려진 유쾌한 작품이다.
뒤죽박죽 엉킨 듯이 보이는 사건들이 결국 하나의 초점으로 모이고, 과거에 그 바닥에서 한 가닥 하던 주인공들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이 행동하며 인간미와 인생의 유쾌함을 보여준다. 과학적 진리 안에서 삶의 나침반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예로부터 하나의 오류로 지적되어 왔지만, 이 소설에서는 과학의 명제들이 소설적 복선으로 쓰이기도 한다. 게다가 ‘외계어’로 치부되는 현대 물리학을 나름대로 쉽게(!) 풀어놓은 미덕도 있다.
이 책은 시나리오 작가와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경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간단하지 않은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로드 무비를 보는 듯한 속도감을 준다. 게다가 쉴새 없이 터지는 웃음 폭탄으로 그 속도감은 한층 경쾌하게 즐길 수 있다.
컬트 마니아들을 양산해 온 <코스믹 반디토스>
이 책이 20여 년간이나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독특한 소재와 더불어 서브컬처 마니아들의 눈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계어로 치부되기만 하던 양자역학이라는 현대물리학의 주요 이론이 탁월한 솜씨로 재조합되어 있는가하면, 짐 모리슨과 도어즈, 만화영화 루니 튠의 주인공들 같은 추억을 자극하는 소재들, 이제는 구할래야 구할 수 없게된 술 이름들, 이국적인 취향을 자극하는 음식들이 곳곳에 등장하며, 서구 부자들의 휴양지가 되어버렸지만, 한때 해적들의 본거지였던 카리브해의 군도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허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 소설에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들(에드가 후버, 닉슨, 카다피, 이디 아만 등)과 마약단속국의 전횡, 지금도 남미의 열대우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맑시스트 반군들이 등장한다. 잠시 언급되는 이름들만으로도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에 속한 역사와 현재를 오갈 수 있으며, 작가는 미국이라는 국가와 아직도 CIA의 공작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미 국가들, 마약 군벌, 혹은 좌익 반군들이 공존하는 세계의 실상을 지적하며, 세계의 현실과 평화에 대해서도 통렬한 그림을 그려낸다.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개를 싫어하는 반군들의 모습, CIA 요원과 악당을 구분해내지 못하는 남미의 군인들, 에어 조단을 신은 인디언 주술사는 어쩌면 현실의 부조리를 증폭시켜주는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명의 친구를 사귀려거든 반디토스를 선택하라!
평생 서퍼로 파도를 타온 작가는 영화 <폭풍 속으로>의 주인공들처럼,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인생의 한 자락에 ‘불법적인 일’에 가담했던 경험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작가의 경력이 반영된 탓에 이 작품은 범죄소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직 덜 떨어진 애어른들의 성장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양자역학이 줄거리와 맞물리며 나름대로 말랑말랑하게 설명되고, 시간여행 각주(!)들이 난무하는 점에서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을 과학소설, 혹은 철학서로까지 분류하기도 한다. 쉽게 장르를 정해줄 수 없는 이 이야기로 작가가 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반디토(bandito; 영어의 bandit-산적, 악당)들의 삶은 얼른 보기에 화려해보이지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명제처럼 예측불가능하며 부조리하다. 양자역학과 반디토라는 기상천외한 조합은 인생을 합목적적인 과정으로 보거나 인생에 대해 정합적인 관점을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한 자조 섞인 비웃음이자, 깨달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어 말한 것처럼 “이치를 따지다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며 머피의 법칙을 패러디한 반디토 법칙 “꼬일 일은 이미 꼬여버렸거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꼬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무엇인가?
작가는 서문 말미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치”며 자신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라고 썼다. 이 책을 덮고나서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을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른다. 마약 군주 호세와 동료 반디토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삶의 단순성과 상대에 대한 충실함, 하이 포케츠가 보여주는 동정심, 양자역학이라는 유사 종교에 빠진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 로버트와 짐.(사실 저자 자신도 사라진 친구를 찾기 위해 남미를 헤메고 다닌 적이 있으며 그 경험을 이 책의 후속작인 <캡틴 제로를 찾아서>에 풀어놓고 있기도 하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의미를 찾아서. 올 여름, 이해하기 힘든 거대 현실 세계는 잠시 젖혀놓고 반디토들과의 여행을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할 점
1. 귀찮더라도 주석들을 빼먹으면 재미가 없다.
2. 각 장 끝에 인용해놓은 양자역학의 유명한 경구들을 외워두자(분명히 써 먹을 때가 온다).
3. 빨리 한 번 읽은 다음 천천히 다시 읽는다.
4. 양자역학의 진실들을 삶의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