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1. 한국 공포영화의 아이콘, 여귀女鬼의 매혹과 불안
검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흰옷 입은 여인. 누군가의 관심을 갈망하며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여고생……. 시대에 따라 표상과 함의는 다르지만, 한국에서 공포영화라는 장르가 생산되던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내러티브와 이미지의 중심에는 ‘여자 귀신’이 있었다. 왜 여귀가 공포영화의 주인공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한국 공포영화는 어떻게 해서 여귀를 중심으로 장르 관습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문학과 대중문화를 넘나들며 연구 주제를 확장해온 백문임 교수(연세대 국문과)의 신간《월하의 여곡성 ― 여귀로 읽는 한국 공포영화史》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공포영화의 핵심 아이콘인 여귀는 가부장적 규범에 의해 희생된 여성이 귀환한 형식이자, 국가가 주도한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고 억압된 가치들이 일그러진 형태로 구현된 이미지다. 이 책은 1960년부터 198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생산되었고 또 1998년부터 현재까지 다시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한국 공포영화의 특질을 그 핵심 형상인 ‘여귀’를 중심으로 규명하고, 근대 대중문화에서 ‘공포’의 코드가 지니는 의미를 살펴본다. 또한 아시아 전통에서 탄생한 여귀가 영화라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근대 대중문화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맥락을, 전래 귀신 서사 및 멜로드라마적 상상력, 근대성과 기억의 정치학 등과 관련하여 짚어보고 있다.
흔히 저급한 장르로 간주되어온 공포영화를 학문적 대상으로 삼아 그 특성과 사회문화적 함의를 탐색한 이 책을 통해, 근대화의 모순을 투영하고 가부장적 권력의 위계를 전복하는 급진적이고 불온한 공포영화의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여성의 귀환,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그러진 표상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한국 공포영화는 전래의 귀신담을 변형해 여귀에게 가공할 능력을 부여하고 흉측하고 두려운 형상으로 시각화했으며, 그들의 직접적인 복수 행위를 내러티브의 줄기로 삼았다. 이제 여귀는 가엾은 희생자나 조력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복수의 주체가 된다. 왜 한국 공포영화는 여귀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복수와 공포의 코드를 입힌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전래의 이야기를 시각화한다는 의미를 넘어 한국 공포영화가 가부장적 규범과 여성, 그리고 1960년대의 사회문화적 풍경을 표상하는 메타포였음을 의미한다. 즉 가부장적 가족 관계나 유교 질서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여성이 귀환한 형식인 여귀는 이 시기 국가 주도형 근대화 프로젝트가 억압한 가치들을 매혹과 불안을 환기하는 대상으로 변형시킨 표상인 것이다.
한국에서 남성 괴물이나 외계 괴물, 또는 괴수나 기계인간이 아니라 여성의 원혼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근대화 프로젝트와 가족, 그리고 기억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전래 귀신담과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을 활용하는 가운데 공포영화는 여성을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지배 질서에서 이탈한 ‘위력적인’ 대상으로 그려낸다. 공식적인 담론의 차원에서 현모양처가 장려되고 양지의 극장에서 ‘춘향’과 같은 ‘열녀’들이 생산되던 것과 대조적으로, 공포영화에서 여성은 삶과 죽음의 경계뿐만 아니라 민족-국가의 경계, 가부장적 가족의 경계, 그리고 근대의 ‘정상적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문제 삼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경계들은 당시 근대화 프로젝트가 생산한 경계였으며 여기에 포섭되지 않는 유동적이고 다양한 자질들을 배제하고 억압함으로써 만들어낸 경계였다. 공포영화의 여귀는 이렇게 배제되고 억압된 자질들이 일그러지고 변형된 형태로 구현된 이미지인 것이다.
3. 왜, 다시 여귀인가 ― 1990년대 공포영화의 연속성과 단절
1980년대 중반 극장에서 사라졌던 공포영화는 영화 제작과 수용 환경이 변화하고 IMF 관리 체제의 경험이 외상外傷으로 각인되던 1990년대 후반에 부활한다. 압축 성장과 고도의 경제 발전이 사상누각이었다고 하는 불안감은 그간 은폐되었던 숱한 이미지를 생산해냈고, 이 과정에서 다시 여귀가 부상한다. 시대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공포영화가 ‘전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여귀를 다시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은, 공포의 아이콘으로서 여귀가 여전히 유효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고전 공포영화의 주된 모티프였던 ‘원한’과 ‘복수’는 최근의 작품들에도 지속되지만, 이제 그것은 처첩 갈등이나 고부 갈등 같은 가정비극 또는 배신당한 사랑과 같은 멜로드라마의 틀을 넘어선다.
최근 공포영화의 여주인공들은 영화의 전반부에는 정체불명의 저주로 고통받는 희생자의 위치에 서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주의 진원지인 여귀의 사연과 처지에 공감하는 위치로 변화하고,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는 저주의 대행자, 심지어 가해자의 위치로 옮겨 가기도 한다. 억울하게 죽은 여성이 원귀로 귀환해 벌이는 복수극이라는 내러티브는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사회문화적 불안과 공포를 다루기에 적합한 틀이 되지 못한다. 여귀는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주인공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귀환하며, 때로는 여주인공이 자신의 욕망을 무대화하기 위해 여귀를 호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불안과 공포를 ‘기억’과 ‘반복’이라는 키워드로 변환시킴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여주인공과 여귀가 맺는 관계, 혹은 여주인공의 괴물성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여성에게 각인된 긴장과 알력을 표상한다. 여성 주인공과 여귀를 등장시키는 최근의 공포영화는 소위 ‘페미니즘의 시대’이자 ‘소비의 시대’였던 1990년대 초중반의 상황과, 반성과 기억이 강제되었던 IMF 관리 체제, 그리고 급속한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을 새롭게 담론화하는 장이다.
4. 아시아 장르로서의 공포영화 ― 여귀와 첨단 테크놀로지의 결합
한편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는 대중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공포영화는 아시아 권역 장르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시아 공포영화Asian Horror’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 영화 <링>의 성공을 계기로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일련의 공포영화를 가리키는데, 이 새로운 장르의 핵심 아이콘 역시 여귀다. 그리고 아시아 공포영화의 주인공으로 대두된 여귀는 흔히 비디오·휴대전화·인터넷 등의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모체로 일상생활에 호출됨으로써, 전지구화 과정에서 아시아 권역 대중문화가 전자 매체 및 젠더와 연관되어 어떤 방식으로 아시아 정체성을 시각화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존재다.
아시아의 전통적인 여귀와 첨단 매체가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새로운 스펙터클은 전지구화된 이산 현상 속에서 여성의 정체성이 민족성이나 친족 관계와 같은 전통적 좌표를 벗어나는 것과 관련되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요구와 유교적 가족 관계 사이에서 여성에게 부과되는 긴장을 시각화한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 공포영화에서 비디오·휴대전화·인터넷을 타고 흐르는 여귀의 존재론은, 유교 질서에 의해 사회화된 여성의 신체 즉 소위 ‘전통적인’ 아시아 여성 신체와는 대극점에 서 있는 낯선 신체의 등장을 말해준다.
5. 지은이 백문임은 연세대 국문과에서 <임꺽정 연구>로 석사 학위를,<한국 공포영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 대중문화의 여성 주인공 이미지를 분석한《춘향의 딸들―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동시대 한국 영화에 대한 평론들을 묶은《줌-아웃 : 한국영화의 정치학》등을 썼고,《카메라 폴리티카 : 현대 할리우드 영화의 정치학과 이데올로기》등을 옮겼다.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