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배가 고파졌다…” ‘고독한 미식가’만의 자기구원 서사 현대인의 허기와 공허를 달래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는 무려 10년 동안 시리즈를 방영했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견고한 팬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제목 ‘고독한 미식가’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시청자들의 애정은 그칠 줄 모른다. 등장인물은 ‘고로 상’ 한 명, 이야기도 ‘밥 먹기’뿐이지만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본 열도를 떠도는 영업 업무를 마치고 긴장감이 풀린 ‘고로 상’은 엄청난 허기를 느낀다. 홀로 찾아 나선 맛집에 자리 잡은 그는, 누군가와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필요 없이, 오로지 맛있는 음식에 집중하며, 먹는 행위를 만끽한다. TV 화면 밖에서 그와 마주 앉은 우리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 함께’의 상태를 경험한다. 〈고독한 미식가〉의 세계관은 드라마의 장면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식당에는 ‘혼밥석’이 생겼고, ‘혼밥 환영’과 같은 안내판이 걸렸다. 식사 시간 만큼 오로지 나를 채우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독한 미식가’는 기꺼이 모든 ‘혼밥러’의 좋은 핑계이자 명분이 되어주었으며, 복잡하고 거대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내주었다. 그래서 ‘고로 상’을 나의 동료나 친구가 아닌 ‘나 자신’으로 대한다. 현대인의 고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한 〈고독한 미식가〉 시리즈는 이대로 끝나지 않은 것 같다. 2024년 10월 〈저마다의 고독한 미식가〉가 시즌 11로 돌아왔으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영화 〈고독한 미식가 더 무비〉가 2025년 초 개봉을 앞두고 있다. 새로운 시리즈와 영화 모두 저자 마쓰시게 유타카가 감독, 연출, 각본, 주연을 맡았다. 대학 시절 문학을 전공하고 연극단에 입단하면서 연기 활동을 시작한 저자는 자신에게 어떤 역할이라도 있다는 듯 저술과 각본 작업, 연출, 연기 등 모든 재능을 창작 활동에 바치고 있다. 글도 맛있게 쓰는 ‘작가 유타카’ 연기 활동과 역할에 대한 고민을 예술적 농담으로 풀어내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익 공여 금지와 같은 제도로 형사가 피의자에게 ‘돈가스덮밥’ 같은 음식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런 장면은 ‘형사물’ ‘느와르물’에서만 등장한다. 저자 유타카는 어쩐지 과장된 클리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 배우라도 현실적인 연기를 펼쳐 보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반숙 달걀과 튀김옷을 기품 있게 두른 돈가스, 그 주위를 장식하는 갈색 양파, 꼭대기에 완두콩이 고상하게 얹혀 있는 돈가스 덮밥”을 앞에 둔 피의자로서는 그것을 먹지 않기란 어렵다. 그래서 유타카는 감독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감독님, 이걸 먹으면 저도 모르게 자백해 버릴 것 같은데요. 먹고 자백해 버리는 설정으로 바꾸는 건 어떠세요?”(13쪽) 스키야키는 또 어떤가. 쇠고기, 표고버섯, 두부, 청경채, 파 등 화려한 재료가 들어가는 스키야키. 육수를 우리는 것부터 재료를 넣고 건져내는 과정을 연극으로 비유하자면, 쇠고기나 표고버섯은 주연에 해당하고, 두부, 청경채, 파는 조연에 해당할 것이다. 저자 유타카는 그중에서도 빠질 수 없는 조연이 있으니, 바로 우지(牛脂)라고 말한다. 하얀 소기름 덩어리인 이 재료는 “사실 프롤로그부터 등장해서, 주인공들이 날뛰는 동안에도 냄비 바닥에서 무대를 떠받치며, 담백한 연기를 펼치는 야채들에게 풍미를 덧씌운다.” 유타카는 주위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려도 소기름 덩어리에 달걀물을 묻혀 꼭꼭 씹어먹는다. 그리고 말한다. “맛있어~~!”(73쪽) ‘우지’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마쓰시게 유타카. 아마 ‘우지’를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타카 자신이 그와 같은 조연 역할을 30년 넘게 맡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끝없이 덧붙인다. “기름은 재활용해서 다시 연료로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다음 세대를 위해 폐유에서 미래를 창조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직전, 자신은 ‘배우’일 뿐이지만 ‘폐유’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속마음을 내비친다. 그러나 그는 70여 편의 영화와 80여 편의 드라마에서 매번 새로운 조연으로 등장하며 미래를 만나고 창조해왔다. 그의 겸손과 다짐은 능청스러운 문장으로 이야기 곳곳에 녹아있다. 에세이 모음 〈연기하는 자의 헛소리〉에는 이처럼 그가 그동안 연기 활동을 해오면서 겪은 현실과 가상의 간극, 배우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허심탄회하고 유쾌하게 풀어놓는다. 이는 때때로 찾아오는 무기력과 좌절을 부정하지 않는 그만의 방식이다. 그는 오히려 ‘이게 바로 인생이다!’라고 말하듯, 무기력을 농담으로, 충만함을 겸손함으로 전환시킨다. 감독, 각본가, 배우, 그리고 작가… 자유롭게 비우고 채우는 아티스트의 매력 단편소설 모음 〈어리석은 자의 잠꼬대〉의 서사 역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저자이자 화자인 마쓰시게 유타카는 눈을 감았다 뜨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 화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화자도 자신을 모른다. 역시나 비중 있는 역할을 맡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을 망치는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화자는 그동안의 경력을 거름 삼아 역할에 대한 이런저런 추리를 이어나간다. 이는 그저 연기를 완성하기 위함뿐 아니라 스스로 정체성을 알기 위한 발버둥이기도 하다. 단편소설 모음 〈어리석은 자의 잠꼬대〉는 한 노인의 범상치 않은 대사로 시작하는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저자가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또 어떻게 바라보고 싶은지가 드러난다. “텅 비었어요. 무無예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자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하차 벨을 눌렀다. “그러오, 그럼 또 우리 절 보러 오시게나.” “고맙습니다. 말씀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아, 그렇지, 텅 빈 것과 무無는 다른 거라우.”─102쪽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무기력과 허기, 허무의 순간을 수없이 겪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좌절의 순간이 ‘무’의 상태가 아닌 ‘공’의 상태라고 말하며, 두 가지 상태를 구분하기를 요구한다. ‘현실’과 ‘가상’을 번갈아 경험하듯, 비워지면 채우기 마련이고, 채워지면 비우기 마련이라는 삶의 이치를 저자만의 방식으로 일러준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은 ‘순환하는 이야기’를 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단편소설 모음 〈어리석은 자의 잠꼬대〉에는 에세이 모음 〈연기하는 자의 헛소리〉에서 등장한 ‘돈가스덮밥’ ‘취조실’ ‘스파이’ ‘SF’라는 동일한 소재가 재가공되어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된다. 저자가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 듯이 에세이에서 보여준 ‘현실’을 단편소설의 ‘가상’으로 창작하여, 주체적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저자의 연기 경력은 배우 커리어에 그치지 않고, 사소한 무엇이라도 만들어내는 재료가 되어 인생 전반에 걸친 여러 가지 창작 작업으로 뻗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