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정신분석이 이끄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돌파구
주목 받는 신예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 마쓰모토 타쿠야의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에 이은
또 하나의 문제작.
라캉이 「수치에 관한 노트」에서 ‘68혁명’의 주체들을 향해 “너희들이 즐기고 있는 것을 똑바로 보라”고 했을 때 그의 비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자본주의가 향락과 맺고 있는 관계가 드러나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68년 5월’의 잘 알려진 “장애물 없이 향락하라!”라는 구호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질서에 대한 해방을 꿈꾼 것이었지만 그들이 몰아낸 주인의 자리엔 또 다른 주인이 등장했을 뿐이었다. 왕의 목을 자른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가 본격화했듯이, 억압적인 근대 국가 질서가 도전받은 이후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저항의 구호였던 자유와 향락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삼키고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 고도화해 갔다. 그와 함께 미국의 반전운동 세대가 월가로 진출했듯이 ‘68년 5월’의 주체들도 나중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질서로 합류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일본의 신예 라캉주의 정신분석가 마쓰모토 타쿠야의 『향락사회론―현대 라캉주의의 전개』는 라캉이 주이상스Jouissance(향락)이라는 프랑스어를 인조이enjoy라는 영어로 번역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는 1975년의 일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라캉이 굳이 주이상스를 인조이와 구분하려 한 까닭은 무엇일까. 본래 정신분석에서 향락은 인간이 안정된 상징 시스템(=상징계) 속으로 들어가는 대가를 치르면서 상실해 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향락하는 것은 (혹은 상실된 향락이 회귀하는 것)이란 상징 시스템이 불안정해지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하자면 향락은 죽음의 이미지를 띠게 되는 것으로 “Enjoy Coca Cola”와 같은 광고 문구에 쓰이는 인조이와 같은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서의 향락은 ‘불가능한 향락’으로 안정된 시스템을 유지하는 법을 위반하고 스스로의 죽음과 맞바꿈으로써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자본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상황은 달라진다. 말년의 라캉이 목도하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법’(이나 사회)은 인간들 각자의 향락을 죽이는(금지하는) 것이 아니고 살리며, 오히려 향락을 길들이기 위한 교활한 수단을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향락’은 목숨을 건 혁명과도 비슷한, 감미로운 파멸로 얼룩진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소비사회에서의 ‘인조이’, 즉 통제 가능한 것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정신분석이 인간 각자의 고유한 욕망(향락)을 발견하고 이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며, 이는 1970년대의 라캉 이론과 그 이전의 그의 이론 적 작업 사이의 단절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처음부터 대타자로서의 ‘아버지’가 확고한 ‘아버지’로서 존재한다는 가정, 즉 모든 것을 포섭하는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소망에 의해 지탱되던 프로이트의 이론이 전개되던 시대와 다른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정신분석의 라캉 시대’는 상징계를 제어하는 ‘아버지의 이름’(=타자의 타자)은 과거와 같은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징계는 확실한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상징계가 마치 확실한 근거에 기반을 둔 안정된 시스템인 것처럼 기능한다는 것은 인간(=신경증자)이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며, 그래서 “이상적 아버지의 이미지는 신경증자의 환상”에 불과하다. 현대의 라캉주의를 주도하는 자크 알랭 밀레에 따르면 오늘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아버지의 기능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이는 왕의 목을 친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것이며 산업혁명은 또 다른 굴절점이 된다.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의 힘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효과는 확고하게 안정되어 있던 것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즉 ‘아버지’와 같이 상징 질서를 제어하는 제3항이 기능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하여 ‘상징계의 기능 부전’ 혹은 쇠약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바야흐로 ‘아버지’(혹은 대타자)가 쇠약해지거나 사라진 뒤 도래한 것이 바로 ‘향락사회society of enjoyment’이다. 여기서의 향락은 ‘불가능한 향락’과는 다르며 ‘인조이’로서의 향락이다. 이러한 향락은 결여되거나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쉽사리 노출된다. 오늘날은 누구라도 손쉽게 SNS를 통해 스스로의 심정을 토로하며 감춰져야 하는 내밀한 사정을 아주 쉽사리 외부에 노출시킨다. 이와 병행하여 귀에는 이어폰, 눈으로는 VR의 고글, 입으로는 공갈 젖꼭지를 문 채 마음에 드는 대상을 언제나 향유하는, ‘기어이 향유하고 마는’ 주체의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한마디로 현대의 주체는 근대 문명에서 전제가 되었던 향락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결여라고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은 증상이나 문화를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상징계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떠한 금지도 알지 못하며 나르시시즘적인 향락에 빠진 인간이 이 세상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과거와 같은 상징계의 ‘법’이 무효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려 들 게 마련이고 이때 질서 유지 장치로서 작동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닌 향락을 강요하는 사나운 초자아이며, 그것의 현실적 구현으로서 통계학적 관리가 등장하게 된다. “향락(소비)하라!”는 초자아의 명령이 지배하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눈을 현혹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통해서 얻는 의존증적인 향락에 매달린 자유이며, 이 소비의 자유조차 일상적 배제를 원리로 삼는 노동사회에서 탈락하지 않을 한에서 누릴 수 있을 뿐이다. 현대란 이른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신뢰를 전제로 한 포섭 시스템이 파산하고 모두를 일상적 배제의 시스템 안에 두는 시대이다. 한동안 출판계에도 유행처럼 등장했던 ‘피로사회’니 ‘□□사회’니 하는 용어들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려는 데서 파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진단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인조이’로서의 향락의 과잉된 강제에 의해, 그리고 그 결과로 소비되는 다양한 소품이 가져다주는 의존증적 향락에 저당 잡힌 현실에, 표피적인 자유의 이면에 도사린 거대한 불안과 우울로 서서히 질식해 가는 현실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이다. 다른 인문사회과학과 달리 정신분석이 이론이면서 동시에 임상 실천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바로 이것이 『향락사회론―현대 라캉주의의 전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눠 후기 라캉 이론과 여기서 발전되어 나간 현대 라캉주의 이론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제1부에서는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핵심 개념인 ‘향락’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에서 라캉을 거쳐 이른바 현대 라캉주의에까지 이르는 정신분석의 ‘이론’을 새로이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라캉주의의 투시도를 명쾌하게 그려낸다. 여기서 저자가 특별히 주목하고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후기 라캉 이론의 열쇠라고도 할 수 있는 ‘잉여향락’과 ‘자본주의 디스쿠르’ 개념을 통해 현대의 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마치 향락을 온전히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을 품게 하고 향락의 결여를 일시적인 방식으로 메워 버리며, 인간의 욕망을 자본 증식의 발판으로 삼는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 데 라캉주의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해 낸다. 즉 ‘자본주의 디스쿠르’를 통해서 구동되는, 다른 누구로부터 ‘감염’된 흔해 빠진 욕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특이성을 획득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정신분석은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피난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2부에서는 정신분석의 ‘임상’에서 현재 다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설명된다. 정신분석이 임상 실천이라는 점에서 이는 빠트릴 수 없는 것으로 정신분석과 조작적 진단 DSM을 적용하는 현대 정신의학과의 대립의 문제를 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