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앤드루 비즈웰 7
시계태엽 오렌지
1부 35
2부 127
3부 197
편집자 주석 273
나드삿 용어 사전 289
『시계태엽 오렌지: 뮤지컬』에 붙이는 프롤로그 / 앤서니 버지스 301
에필로그: 새파랗게 어린 놈들에 대한 짤따란 썰 / 앤서니 버지스 312
에세이, 저널 그리고 리뷰
러시아 사람들 / 앤서니 버지스 327
시계태엽 마멀레이드 / 앤서니 버지스 338
출판되지 않은 앤서니 버지스와의 인터뷰 중 일부 348
「시계태엽 오렌지 2004」를 위한 프로그램 노트 / 앤서니 버지스 357
‘루트비히 판’, 메이너드 솔로몬의 『베토벤』 리뷰 / 앤서니 버지스 363
황홀한 금빛 주홍색 / 앤서니 버지스 371
시계태엽 오렌지 / 킹슬리 에이미스 384
새로운 소설 / 맬컴 브래드버리 387
호러 쇼 / 크리스토퍼 릭스 389
모든 삶은 하나다: 『시계태엽 성경, 또는 엔더비 씨의 종말』/ A. S. 바이엇 409
후기 / 스탠리 헤드거 하이먼 416
폭력에 대한 마지막 말 / 앤서니 버지스 430
『시계태엽 오렌지』를 위한 앤서니 버지스의 1961년 타이핑 원고에서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타자본(1961) 435
작품 해설 441
증보판 역자 후기 448
작가 연보 451
시계태엽 오렌지
Anthony Burgess · Novel
232p

1962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래 끊임없는 논란과 열광을 낳으며 20세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이 소설은 외부의 힘에 의해 태엽이 감겨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상에 대한 반성을 제시한다. 폭력과 죄악에 대한 성찰 속에서 국가 권력의 억압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옹호하는 이 작품은 당대의 속어와 신조어를 과감하게 차용하고 서술 형식에 음악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소설 기법 면에서도 일대 혁신을 이루어 냈다. 이 책은 『시계태엽 오렌지』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에 나온 증보판을 번역한 것으로, 편집자 주석, 은어 사전, 앤서니 버지스의 에필로그와 여러 편의 에세이, 미출판 인터뷰, 1961년 타자본 등과 맬컴 브래드버리, A. S. 바이엇 등 작가들의 리뷰 등을 부록으로 실어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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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떤 정부라도 버젓한 젊은이를 태엽으로 돌아가는 기계로 만드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그건 탄압을 자랑스레 여기는 정부나 하는 짓이야.”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의 의미를 묻는 20세기의 문제작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A Clockwork Orange」의 원작 소설
출간 50주년 기념 증보판. 편집자 주석, 은어 사전, 앤서니 버지스의 에필로그와 여러 편의 에세이, 미출판 인터뷰, 1961년 타자본 등과 맬컴 브래드버리, A. S. 바이엇 등 작가들의 리뷰 수록.
‣ 머리카락이 쭈뼛 서게 만드는 속도감과 에너지. 오웰의 미래상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뉴욕타임스》
‣ 앤서니 버지스의 작품은 불쾌하고 충격적으로 보이나, 흔치 않은 철학적인 소설이다.
—《타임》
‣ 나는 버지스만큼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를 알지 못한다. —윌리엄 버로스
‣ 앤서니 버지스는 경이로운 지식인인 동시에 세계를 감싸 안는 자애로운 영혼이다.
—존 업다이크
『시계태엽 오렌지』는 1962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래 끊임없는 논란과 열광을 낳으며 20세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이 소설은 외부의 힘에 의해 태엽이 감겨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상에 대한 반성을 제시한다. 폭력과 죄악에 대한 성찰 속에서 국가 권력의 억압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옹호하는 이 작품은 당대의 속어와 신조어를 과감하게 차용하고 서술 형식에 음악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소설 기법 면에서도 일대 혁신을 이루어 냈다. 이 책은 『시계태엽 오렌지』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에 나온 증보판을 번역한 것으로, 편집자 주석, 은어 사전, 앤서니 버지스의 에필로그와 여러 편의 에세이, 미출판 인터뷰, 1961년 타자본 등과 맬컴 브래드버리, A. S. 바이엇 등 작가들의 리뷰 등을 부록으로 실어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철저한 옹호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하고 논쟁적인 주제는 등장인물 중 작가 알렉산더와 교도소 신부의 말 속에서 반복된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 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일 수 없으며 다만 태엽 달린 오렌지처럼 수동적인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성원들의 선택과 동의 없이 실행되는 모든 사회적 결정은 원천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 의지의 무조건적 긍정은 주인공 알렉스의 무차별적 폭력의 자유와 맞물리며 보다 첨예한 문제의식을 요구한다.
버지스는 알렉스가 저지르는 폭력과 공동체에 미치는 해악의 강도를 극단화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폭력의 자유까지 인정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버지스는 선과 악, 그리고 자유의 한계라는 통념을 모두 거스르는 인물로 알렉스를 설정함으로써, 자유와 윤리에 대한 상식적인 논리의 구도를 깨뜨리려 한다. 알렉스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아직 열다섯 살에 불과한 미성년자이며, 자신의 행위의 영향이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또한 대중문화의 사회 통제적 속성에 반감을 갖고 있으며 고급문화의 향유자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선인도 악인도 아닌 미성숙한 인물, 모든 통제에 반대하며 절대적인 자유를 원하나 그 자유의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완벽한 반항아로서 알렉스는 윤리적, 문화적, 세계관적 자기모순에 빠진 현대인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
현대인에게 선과 악이란, 그것이 종교적인 덕목이든 공동체의 규범이든 법적인 규칙이든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자유 의지 또한 선이나 악 어느 한쪽으로 정향(定向)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 어떤 강요나 억압이 가해질 때, 즉 순수한 개인의 선택이 아닌 경우, 그것은 인정될 수 없다고 버지스는 역설한다.
■ 죄악의 근원에 대한 통찰
작품의 배경인 미래의 런던은 온갖 범죄가 난무하며 이에 맞서는 사회 통제 또한 범죄의 강도에 못지않은 폭력성을 지닌 암울한 디스토피아다. 학교나 교도소 등의 국가 장치는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며, 오직 순응적 인간과 비순응적 인간을 격리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알렉스의 폭력성과 비규범성이 이러한 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체포된 후 겪는 교도소 생활은, 환경적 요인으로써 인간의 심성을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무용함을 보여 준다.
알렉스가 자원하여 받는 루도비코 요법은, 인위적인 실험을 통해 인간의 범죄적 속성을 통제하려는 환경 결정론의 극단화된 형태다. 피실험자는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빼앗긴다. 버지스가 보기에 이와 같은 환경 결정론의 오류는 죄악의 근원을 따져 보려는 사고방식이 일종의 무균질 인간이라는 허구를 전제하고, 한 인간이 겪는 복잡다단한 삶의 이력을 통제하거나 변형할 수 있다는 인위적 시술의 가능성을 상정하는 데 있다. 버지스가 교도소 신부의 입을 빌려 펼치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모순적인 주장은, 무엇이 좀 더 인간적인가라는 반문이며, 그 토대 위에서 개인의 삶과 공동체 조건의 개선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악의 근원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인간적 진실의 질문, 즉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점차 박탈되어 왔으며, 현대에 들어와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데 있다. 신화와 종교, 사회적 기제라는 외부의 권위와 위협 속에서 한 개인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반성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어 왔다. 특히 사회 통제의 장치가 고도화되고 대중 매체의 영향력은 절대적으로 커져, 사유하고 반성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제목 그대로 태엽 장치를 달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주체적인 반성의 능력을 잃어버리면서,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의식 또한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러한 조건이 곧 죄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 음악적 구성과 혁신적 언어
버지스는 작가인 동시에 고전 음악 애호가이자 작곡가였다. 그의 관심사 중 하나는 음악적 요소를 문학 속에 통합하는 것이었으며, 『시계태엽 오렌지』는 그러한 시도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전체 3부 구조인 이 작품은 각각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3부의 후반부 장들은 1부의 전반부 장들을 형식적으로 반복하되, 내용적으로 반전(反轉)시키는 대구를 이룬다. 이러한 반전의 기법은 소나타의 론도 형식, 혹은 교향곡의 상승, 하강과 유사한 효과를 가진다. 예를 들어, 1부 3장에는 알렉스가 코로바 밀크 바에 앉아 죽음에 관한 아름다운 아리아를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3부 5장에 가면 음악에 고문당하다시피 하다가 그가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식이다.
음악적 구성과 더불어 이 작품의 뚜렷한 개성은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이 구사하는 십 대들의 은어 및 비어인 나드삿(NADSAT)에서 잘 드러난다. 작품 속의 독특한 어휘들은 당시 런던 지역의 방언인 ‘코크니(cockney)’에서 착안, 러시아어에 기초하여 직접 고안해 낸 것이다. 그는 언어학에 관한 저서들을 냈을 만큼 언어 문제에 관심이 컸으며, 일상 언어와 문학 언어의 특질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버지스가 발명해 낸 비어는 알렉스와 그 또래들의 사회적 소외와 일탈성, 배타성을 드러내며,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문맥과 음성적 유사성에 따라 단어의 의미를 유추하게 만드는 효과 또한 지닌다. 문학 언어의 특성을 일상 언어에 대한 의심과 반성에서 찾는 그의 언어관은 반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작품의 주제와 맞물려 있다.



권혜정
4.0
강요된 선이 나은 것인가 스스로 선택한 악이 나은 것인가
thisutopia
4.0
민음사 번역은 역시 구리다.
영화보고싶다
4.5
일단 제목부터 또라이같다. 내용은 더하다.
현진
3.5
흐름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분명한 구성의 책은 오랜만인지라 정신없이 읽었다. 영화가 너무 기대가 된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가 매 막마다 반복되는 것도 이유없이 너무 좋았다.
jukii
4.0
상큼한 제목과 대비되는 내용에 충격받은 중학생은 어쩔거요 ㅋㅋㅋㅋ 에라이
MMXXII
4.0
강요된 선이냐 자연스러운 악이냐의 문제보다는 오렌지와 시계태엽, 시계태엽 오렌지의 제안들이 흥미롭다. 오렌지는 풋오렌지에서 달콤한 오렌지로 익어가는 것, 시간이 만드는 성숙, 자유의지, 자연스러움이다. 시계태엽은 태엽을 돌려 강제로 초단위로 움직이는 것, 강제적 교화와 교육 : 금지, 조정, 통제를 의미한다. 강제적 교화와 조정은 소설에서 결국 무의미해진다. 마지막에서 알렉스가 피트의 아내를 보고 발현된 감정들은 행동의 변화와 성숙을 암시하는데, 작가는 오렌지의 편에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선의 자연스러운 발현에 조금 더 희망을 두고 있지 않나 싶었다. 극본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가 ‘오렌지’ 로 표현되어 있다. 오렌지 속에서 째깍째깍 하는 태엽 소리가 들린다. 신은 언제든 손 닿을 곳에 선악과를 둔다. 결국 신이 있다면 선악이 애초에 전제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서 주어졌다는 얘기. 신이 제한하는 것은 실은 제한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순응과 위반 중 선택하는 것이며 그 경계 또한 해석 나름이고 그 결과도 선택에 따라 짊어지는 것. 결국 ‘원죄’라는 건 없다는 거다. 재밌다. 애초에 선악은 동시에 있었고, 선악의 자연스러운 발현도 인위적 교화와 조정에 순응할지도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 그 모든 것 위에 (선택)의지만이 있다는 느낌도 든다. Bog의 천사가 따는 걸 도왔다는 “시계태엽 오렌지” 는 오렌지의 향과 맛이 나지만 태엽이 있어 진정한 자유의지의 상징은 아니다. 그런데 까짓거 오렌지를 ‘먹지’ 않고 ‘맛보기’로 한데서 자유의지가 등장! 그렇게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해서 그게 뭐? 그것도 모든 가능한 선택 중 하나였고 그 결과일 뿐인데 그게 죄와 벌인가? “도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만이 중요하다”는 말도 재밌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겉보기엔 오렌지같아도 진짜 오렌지, 진짜 자유가 아니다. “천사”, 즉 선(누구를 위한 선인지 알 수 없는)을 표방하는 것이 줬다고 모두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선악 양쪽을 다 저울질 해보는 자유의지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파괴는 창조이며 평화가 칼이듯. 태엽으로 가는 오렌지는 째깍째깍 옳은 것 아닌 것을 칼로 베듯 구분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 결국 “시계태엽 오렌지”는 자연스럽지 않고, 그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애초에 신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자연스럽고 가능한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그냥 오렌지일 뿐인데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인간이 아닌가. 신을 믿고 선을 믿는 자들은 실은 천사(인 것 같은)가 따줬다는 시계태엽 오렌지를 믿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애초에 진짜 오렌지를 생각조차 않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부분이다.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도,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도 떠오르고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얘기하는 ”하나의 강력한, 높은 곳의 순수한 공기“에 더 끄덕이게 하는 의외로 철학적 구석이 많은 책. 게다가 언어. 언어로 구체화되고 구분지어진다는 그 얄팍한 개념들의 경계가 도리어 웃기다는 걸 보여주는 점도 재밌다. 근데 참 번역이... 라임도 없는 은어에 동어 반복이라 문학성이 떨어진다. 그 찬란하다는 은어 사용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전반적 극의 디테일한 유희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게 아쉬운 부분. “초강력 폭력” 이런 것들이 “핵폭력”이나 뭔가 우리말로 딱 떨어지는 번역이었다면 좋았을 걸... 다음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발췌한 부분! '이런 게 자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열을 품는 것, 황금 조각을 그러모으는 것,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정열을 무찌르고 보물을 사방에 날려버리는 것. 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서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만들어진갓
4.0
악을 거세한 뒤 남아 있는 건 선일까.
김예림
5.0
이 모든것이 사춘기의 열병이라니.. 몇 문단의 차이일 뿐인데, 영화와는 극명히 다른 결말을 보인다. 어쩌면 큐브릭의 선택이 절대악을 드러내는데는 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나는 작가의 작은 희망사항을 읽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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