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9
2부 83
에세이: 슬픔이여 안녕 _프랑수아즈 사강 189
옮긴이의 말: ‘사강다움’의 원전, 그 소설 속에서 ‘나’를 만나다! _김남주 215
프랑수아즈 사강의 삶: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_트리스탕 사뱅 231
작가 연보 263
슬픔이여 안녕
Francoise Sagan
2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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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슬픔이여 안녕》이 프랑수아즈 사강 15주기를 맞아 새 번역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슬픔이여 안녕》은 사강에게 ‘문단에 불쑥 등장한 전대미문의 사건’ ‘매혹적인 작은 괴물’이라는 수식을 안기며 또 다른 천재 작가의 출현을 알린 데뷔작이자 사강 문학의 정수를 이루는 대표작이다. 열여덟 살의 대학생이 두세 달 만에 완성한 이 소설은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비롯한 쟁쟁한 문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비평가상을 받았고 전후 세대의 열광 속에 ‘사강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 모리아크가 “첫 페이지부터 탁월한 문학성이 반짝이고 있다”고 평한 이 작품은 아버지의 재혼이라는 사건 앞에서 자기 내면의 낯선 감정과 마주하게 된 십 대 후반의 섬세한 심리를 더없이 치밀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내며 어느새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간명하고 예민한 필치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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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20세기 초유의 문학적 스캔들
프랑수아즈 사강 사후 15주기 기념 《슬픔이여 안녕》 정식 출간
화보, 에세이 등 풍성한 자료와 새 번역으로 만나는 사강의 대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매혹적인 작은 괴물’ 프랑수아즈 사강을 탄생시킨 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_11쪽
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슬픔이여 안녕》이 프랑수아즈 사강 15주기를 맞아 김남주 번역가의 유려하고 감각적인 새 번역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슬픔이여 안녕》은 사강에게 ‘문단에 불쑥 등장한 전대미문의 사건’ ‘매혹적인 작은 괴물’이라는 수식을 안기며 또 다른 천재 작가의 출현을 알린 데뷔작이자 사강 문학의 정수를 이루는 대표작이다. 열여덟 살의 대학생이 두세 달 만에 완성한 이 소설은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비롯한 쟁쟁한 문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비평가상을 받았고 전후 세대의 열광 속에 ‘사강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
모리아크가 “첫 페이지부터 탁월한 문학성이 반짝이고 있다”고 평한 이 작품은 아버지의 재혼이라는 사건 앞에서 자기 내면의 낯선 감정과 마주하게 된 십 대 후반의 섬세한 심리를 더없이 치밀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내며 어느새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간명하고 예민한 필치로 보여준다.
책에는 40여 년이 지나 《슬픔이여 안녕》을 쓰던 때를 돌아보며 쓴 사강의 에세이, 사강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는 풍성한 사진 자료, 프랑스 비평가 트리스탕 사뱅이 촘촘하게 사강의 삶을 그리는 글을 함께 실어 탐닉과 몰아의 경지에서 자신을 끝까지 불태웠던 한 천재의 다양한 면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요란하고 화려한 삶 이면의 또 하나의 우주
사강이 ‘평생에 걸쳐 사랑한 그 무엇’, 문학
“문학과 더불어, 단어와 더불어, 문학의 노예이자 대가인 이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문학과 함께 달리고,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문학을 향해 기어올라가야 했다. 그러니까 그것을, 조금 전 읽고서도 내가 결코 쓰지 못할,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같은 방향으로 달리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을 향해.” _프랑수아즈 사강
‘매혹적인 작은 괴물’ ‘문학계의 샤넬’ ‘열여덟 살 난 콜레트’. 사강을 수식하는 수많은 문구에서 알 수 있듯 사강은 등장과 동시에 자유로운 성, 속도감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문장의 아이콘으로, 한 시대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20세기를 열광시킨 이 작은 괴물은 말년까지도 쉼 없이 작품 세계를 연마하며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속도와 알코올, 도박과 약물에 탐닉하는 자유분방한 삶으로도 유명세를 치른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집약되는 사강의 삶은 소진과 탐닉으로만 이뤄진 듯하지만, 사실 사강의 삶을 지탱한 것, 사강이 끝까지 고수한 것은 오로지 문학뿐이었다. 그리고 사강이 쓴 모든 작품들의 기원, 사강 문학의 성소가 바로 《슬픔이여 안녕》이다. 문학적 재능이 반짝이는 대담하고 섬세한 심리 묘사와 인간 본성에 관한 치밀한 성찰, 지극히 효율적인 구성, 독특한 인물들은 그 누구와도 다른 사강만의 문학 세계를 잘 보여준다. 특히 ‘슬픔’이라는 삶에서 처음 마주하는 감정에 관한 성찰과, 그것을 받아들이며 어른의 세계로 입문하는 주인공의 내면에 관한 묘사에서 사강의 문학성은 빛을 발한다.
사강 15주기에 다시 만나는 사강 문학의 기원
풍성한 자료와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는 《슬픔이여 안녕》
사강은 1954년의 한 대담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작가는 같은 작품을 쓰고 또 쓰는 것 같다. 다만 시선의 각도, 방법, 조명만이 다를 뿐.” 사강이 열여덟 살에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했을 때 사강은 이미 사강이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간결하고 예리한 고찰, 경쾌하고 우아한 문장, 기성의 도덕과 관념을 향한 냉소, 과감한 구성과 줄거리. 모든 천재의 첫 작품이 그렇듯이 사강의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에는 사강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강 본인이 말했듯 이후 사강이 발표한 수십 권의 작품들은 모두 《슬픔이여 안녕》에서 출발한, 《슬픔이여 안녕》의 다양한 변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프랑수아즈 사강 15주기를 맞아 아르테에서 정식 출간한 사강의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은 번역가 김남주가 사강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를 세심하게 살려 새로운 번역으로 선보인다. 충실한 번역에 더해 풍성한 사진 자료, 작품의 이해를 돕는 글 두 편도 함께 수록됐다. 《슬픔이여 안녕》이 출간된 지 40여 년 뒤에 사강 본인이 그 시절을 돌아보며 쓴 에세이는 작품에 대한 생생하고 흥미로운 감상을 전하며, 사강의 삶을 출생부터 사망까지 추적한 비평가 트리스탕 사뱅의 글은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었던 사강의 삶의 다양한 면면을 소개한다. 새로운 표지,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는 《슬픔이여 안녕》에서 독자들은 여전히 매혹적인 사강 문학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르 몽드》 선정 ‘세기의 책 100권’
1954년 프랑스 비평가상 수상



장콕토
3.0
이 소설의 원어 제목에서 안녕은 Adieu가 아닌 Bonjour, 그러니까 만날 때 하는 인사다.
영아
4.0
<슬픔이여 안녕>은 부도덕적인 쾌락주의자 세실이 내밀한 자아분열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서사이다. 그동안 고전소설에서 여성의 역할은 도덕적인 현모양처 혹은 부도덕적인 창녀로 남성의 성장 서사에 등장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사강은 이 역할을 뒤집어 시릴과 아버지를 세실의 성장을 위한 소모적 캐릭터로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시릴의 신체적 묘사라거나 키스의 순간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그동안 봐왔던 남성 작가들의 저속한 성적 묘사가 떠오르면서도 그들에게는 없던 낭만이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릴과 아버지가 단순 소모적 캐릭터라면 세실을 진정으로 성장하게 만든 조력자의 역할은 다름 아닌 안이다. 안을 엘렉트라콤플렉스에 의한 질투의 대상이라 착각할 법 하지만 세실이 안에게 느낀 거부감은 자신을 변화 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서사는 세실과 아버지 사이에 등장한 안으로 인한 갈등이 아닌, 세실의 평온한 삶에 등장한 안으로 인한 변화이다. 저속하고 부도덕한 삶을 이상으로 여겼던 세실에게‘그녀는 내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행복과 유쾌함, 태평함에 어울리게 태어난 내가 그녀로 인해 비난과 가책의 세계로 들어왔다. 자기 성찰에 너무나도 서툰 나는 그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안은 내 생활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세실은 안을 통해 자기 성찰과 자유와 존재의 사유를 고뇌한다.(왜 나 자신을 그렇게 비판해야 하지? 나는 그냥 나야. 그러니 사태를 내 마음대로 느낄 자유가 있는 게 아닐까? 평생 처음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완패당하고 싶다는 욕망, 애정을 향한 갈망이 엄습했다.’ 안은 유일하게 세실의 감정을 동요시켰고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므로 안의 비극은 그녀가 세실의 아버지와의 사랑이 실패한 것에 대한 결말이 아닌 세실의 성장을 위한 비극인 것이다. 언젠가 안이 세실에게 ‘사랑이란 하나하나 동떨어진 감정이 아니’며 ‘지속적인 애정, 다정함, 그리움.’이라고 가르친다. 사강 특유의 서사에서 보이는 사랑의 부질없음으로 인해 세실은 일상을 되찾지만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다 실패할 때, 조가비를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안을 그리워한다. 즉 그녀의 사랑이 어느 방향에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인 셈이다. 저속하고 부도덕하고 생각 없이 쾌락만을 추구하던 세실은 안을 통해 슬픔을 조우하며 성장한다.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
이호윤
3.5
압도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감정, 슬픔. 역설적이게도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허무는 감정, 슬픔. 그렇게 섞이는 체험에도 나는 역시나 나의 세상을 지킬 권리가 있다.
134340
3.5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삶의 꽤 많은 사건에 질투가 관여해 있더라.
4848
5.0
때때로 상대에 대한 감정이 지나치게 되면 상대를 객체화하거나 이미지화하게 돼서 상대가 사람이라는 걸…상대도 상처를 받는 사람인 걸 잊을 때가 있다 그게 사랑이라는 감정이든 동경이라는 감정이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방구석인문학도
4.5
열 달 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통과의례처럼 읽으며 나는 내가 이 책에 대한 세간의 열광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임을 알았다. 『데미안』은 물론 유년기 상실의 아픔과 자아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고 가치 체계의 혼란을 마주하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잘 그려낸 소설이다. 그러나 올바른 주체로 우뚝 서는 일, 오직 단단한 내면을 갖는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방황이란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내게 이 소설은 너무 강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슬픔이여 안녕』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대신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파편에 상처 입는 새의 이야기이고, 성숙의 기회가 퇴행의 욕구에 잠식되다 끝내 굴복하고 마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간이 흘러도 극복될 수 없는 아픔에 대한, 그런데도 그런 대로 살아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성장'이라 불리는 사건의 실체를 이 이야기에야말로 예리하게 포착하고 건져내는 힘이 있다. 성장은 반드시 슬픔을 딛고 일어나 다음 단계로 올라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안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인사를 건넴으로써 수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모든 고통과 단절해야 할 필요도, 그럴 능력도 없다. 용기가 두려움에 파훼당한 폐허 위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 사강은 그걸 아프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미워하는 것은 애정에 대한 갈구를 저버리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콤플렉스다. 그런데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가 이 아픔을 묵묵히 통과하는 것 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장이란 미명 하에 과거에 갇히지 말라고, 알을 깨고 나오라고 많은 작가와 강사들이 소리치지만, 나는 삶이 결코 그런 식으로만 작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정할 수 없다면 명명하는 것이 낫다. 나로 산다는 것은, 나만의 용법으로 세계의 존재들을 호명해 나가는 과정까지 포괄하는 일이므로.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첫 문장, p. 11)
박규희
5.0
어떤 생경한 느낌을 적지 않으면 글에 대한 감상은 잊어버리고 그저그런 후회만이 남을 것 같아 이 글을 남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만해도 기약 없는 결말을 기다리며 천천히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나는 틈틈히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밥을 거르며 읽게 되었던 것이다. 밥먹을 시간도 아까워 만화책을 들었던 어린시절 나 처럼, 시간보단 의미가 중요했던 순수한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구부리면 부러지는 사람이 있다. 쉽게 구부러질 것 같지만 그리 쉽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저 구부리는대로 구부러지는 사람도 있다.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다른 상황의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정도에 좌절하겠어"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다가 크게 좌절하는 사람을 보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내가 했던 방식대로 그 사람도 날 따라오갈 바랐던건데, 이미 내가 지나왔던 방향이라 다른 사람도 쉬울 거라 생각했던 건데, 아니었던거다. 셰실과 안은 평행선에 서있는 인간 군상이다. 쉽게 구부러지는 부드러운 사람과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한 사람. 그 정도의 여하를 떠나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기에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충동적인 사람과 이지적인 사람이 있다면 실수를 저지르는 쪽은 보통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셰릴도 그랬다.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법을 알지 못해 안에게 상처입혔다. 이 소설은 상처입힌 마음에 대해 참회하는 소설이다. 슬픔이여 안녕은 슬픔에 대한 작별인사가 아니라 첫인사였다. 한국말의 중의성에 기인한 착각이었다. 장난에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했다.의도치 않은 행동애 어떤 사람은 죽을 만큼 슬퍼할 수 있다. 어떠한 행동을 하지말자고 할 순 없다. 행동도 결국 자신의 마음 속에서 나오기에.
신지구
3.5
Bonjour Tristesse. 그해의 무더운 여름은 누군가에겐 가장 추운 계절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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