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처소를 뚫고 나오는 최정례의 시,
21년만에 새 장정 입다
시란 존재와 부재의 전후가 구별 없이 혼효되는 자리로 들어서는 것임을 이보다 더 넓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수명 시인
최정례 시집 『햇빛 속에 호랑이』(세계사, 1998)가 아침달 출판사에서 복간됐다. 시인의 개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주저이나 한동안 만날 수 없었던 최정례의 두 번째 시집을 초판 발행 21년 만에 새 장정으로 만들어 새 독자들 앞에 선보인다. 시간, 죽음, 노동, 사랑이라는 네 가지 보편적 주제 아래 50여 편의 시를 묶은 본 시집은 시간과 기억 속에서 흐트러지고 휘발되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존재와 부재에 관한 물음들을 던진다. 표제작을 비롯한 많은 시편들을 여성 화자라는 관점을 통해 읽어 내려갈 때, 시집 도처에서 발견되는 부재에 대한 감각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러한 다시 읽기를 통해 최정례의 시가 선취했던 감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는 무관하게 유령처럼 흘러가는 이미지들
『햇빛 속에 호랑이』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장면 들은 꿈처럼 흐릿하다.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 현실의 것인지 꿈속의 것인지 분간키 어려운 그 이미지들은 주체의 시선을 “조용히 스쳐 지나”가고 “급히도 사라져버린”다.
갑자기 바람이 한 줄 불더니 나뭇잎들 쏟아지고 벌판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변했습니다 오래 걸었습니다 아이가 달려오며 부르는 소리 들은 것도 같습니다 꽃을 내미는 것도 같았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뒤돌아 안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돌아본 듯도 합니다 그 집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아니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끝 장면」 부분
“일 분 동안에 십수 년이 흘러”가는 기억의 시간 속에서 이미지는 흐릿한 상태로 삽화처럼 등장한다. 최정례의 시 속에서 이 기억의 이미지는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있으며, 나는 그 시간의 한 틈에 놓여 흘러가는 풍경 사이를 스치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이 시집에서 현실과 몽환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설화, 민담과 상상이 뒤섞인 채로 장면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주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령처럼 흘러”가는 이러한 이미지들 속에서 독자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당혹감에 관해 해설을 쓴 이수명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실은 우리 또한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며, 따라서 우리 또한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지금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는 그것들처럼 우리 또한 처소 없이 순간적으로 편재할 뿐이라고 말이다.
흐릿한 생에 구멍 내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도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모르게 된다.”라는 이수명의 말처럼, 시집 곳곳에는 영문도 모르고 삶의 처소에 던져진 화자들이 등장한다. 「약국을 지나다」의 화자는 자신이 “왜 여기를 지나는지/왜 저 붉은 알약들을 바라보았는지/모른다”. 「고기 사러 갔던 길」의 화자는 고기를 사러 나갔다가 엉뚱한 장면들과 조우하며 길을 잃는다. 이러한 ‘삶 속에서 길 잃기’는 꿈이나 죽음과 같은 부재의 편린으로 자주 등장하며 변주된다.
때때로 그 꿈, 혹은 죽음 같은 부재는 자기 존재에 대한 외부의 부정으로도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여성의 노동과 관계하는 두 편의 시는 특히 그렇다. 「밥 먹었느냐고」는 가족 중 아무도 자신에게 밥 먹었느냐고 묻지 않아 꽝꽝나무를 향해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날 여보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라며 “밥 먹었어?” 하고 물어봐주겠냐고 요청하는 시다. 가족의 삶 속에서 그 존재가 축소되고 소외되는 여성의 날것인 목소리라 더 진실하게 다가온다. 표제작 「햇빛 속에 호랑이」는 이러한 여성의 희생을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패러디해 그려내고 있다.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빠빳한 수염 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불타는 초록의 호랑이 눈깔을
햇빛은 광광 내리퍼붓고
아스팔트 너무나 고요한 비명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거라, 증조할머니 비탈밭에서 호랑이를 만나,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인 거라(…)
―「햇빛 속에 호랑이」 부분
호랑이를 만나 떡으로는 모자라 팔다리를 다 내어줄 정도로 자기를 희생해가며 집안을 일으킨 여자들의 이야기를 강렬한 채도의 이미지로 그려낸 이 시는 어떤 부정으로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되는 여성성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시의 힘은 자기도 모르게 내던져진 흐릿한 생의 한가운데를 찢고 구멍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