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죽음과 삶이 분간되지 않는 곳에서 탄생한 작가가 비로소 그려 낸 지옥도와 탈출로 두 권의 시집, 『연애의 책』과 『식물원』으로 낯선 감각과 선득한 개성을 보여 준 유진목 시인의 신작 시집 『작가의 탄생』이 민음의 시 275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작가라는 미명 하에 사람이 아닌 것을 호명하고 탄생이라는 정언을 말하면서도 삶의 바깥에 골몰한다. 그런 유진목의 언어는 많이 “다르고” 꽤 “위험”해 보인다. 더하여 “불안의 근원”이고 “분열의 씨앗”과 다름 아니다. 그런 언어가 모여 이루는 이야기는 여태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게 된 자의 “터널”이며 사람이길 그만두고 싶은 이의 “내장”이 된다. 안과 밖에 걸쳐진 지옥도가 펼쳐진 셈이다.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이토록 산발적이며 연쇄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어쩌면, 우리에게 지옥 너머를 꿈꿀 수 있는 탈출로를 제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발견은 “파로키”의 뒷모습을 보고 “로스빙”에게 말을 거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 사람이길 그만두고 싶은 다른 삶이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어느 날 아버지라는 자가 나타나 내게 말했다 -24쪽 탄생과 동시에 지옥의 문은 열린다. 시작은 아버지와 총이다. 대문자 표식을 한 아버지를 죽이는 데에서 작가는 탄생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오래 반복되어 온 아버지의 죽음과 부활은 시를 진부하게 만들 테지만 유진목의 시에서 아버지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로 이미 탄생해 버린 작가를 좇는다. 혹은 기다린다. 이번 생에서 아버지는 아이를 버리고 다음 생에서 아버지는 아이를 찾아온다. 시의 화자는 그를 죽이기 위해, 안부를 전하려, 심지어 결혼 소식을 알릴 목적으로 아버지를 찾는다. 기괴한 방식으로 이어지는 조우는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하고 그럼으로 작가의 탄생은 불가해함을 알린다. 새로 고칠 수 없으니 죽음을 택해야겠지만,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연명을 끝내야겠지만…… 지옥은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는 잘 도착했어요. 아침 일찍 투숙해 한낮을 잤습니다. 태백의 눈은 한 번도 녹은 적이 없다고 해요. 늦봄에 파묻혔던 고라니를 녹이면 금방 산속으로 뛰어 숨는다고요. -123쪽 사람이길 그만두고 싶은 시는, 사람이길 계속해야 함을 받아들이는 여행으로 몸피를 바꾼다. “파로키”와 “로스빙”과 “할린”에 대한 비밀을 중얼거리면서, 여행자는 밀항을 계획하고, 스위치백 열차에서의 동행을 약속하고, 원산에 가기를 권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여행이 아닌 “모르핀”뿐이다. 모르핀을 갖고 있을 거라 멋대로 추측했기에 자행되었던 계획과 약속과 권유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 우리는 모르핀이 없는 사람이고, 결국 우리는 사람이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없고, 죽음으로도 사람임을 멈출 수 없으며, 결국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왜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음으로 신에게 묻는다. 신이 되묻는다. 인간이 대답한다. 신이 다시 묻는다. 질문의 반복 속에 출구 방향의 화살표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식물원을 거쳐야 가능한 탈출의 경로다. 질기게 살아가야 할 우리는, 삶의 몫을 더 단단히 하기 위해 작가가 탄생시킨 식물원을 지나쳐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호흡을 가다듬고,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결국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