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한영숙의 처녀시집 『얼룩무늬쐐기나방』이 ‘시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한영숙의 처녀시집은 시를 위한 열정과 순정함이 맑게 살아 있다. 시의 밑바탕에는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날아가는 우화에의 꿈을 상정한다. 이 시집의 표제작 「내 안의 얼룩무늬쐐기나방」은 이러한 우화 시편들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이번 시집을 지배하는 정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단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우화(羽化)에의 열망과 순정
침을 많이 흘리고 맥없이 넘어져/자주 울던 어린 날/할머니는 어머니 몰래/버드나무 속을 뒤져 내게 쐐기집을 구워 먹였다/애벌레가 내 위액을 핥아먹으며 자라는 동안/나는 거짓말처럼 침을 흘리지 않았고/실없이 울지도 않았다/숱한 생각들이 쐐기알처럼 스멀거리며/조금씩 내 속을 잠식해 갈 때/살찐 애벌레는 점차 날갯짓을 꿈꾸며/뜨거운 몸 안에서 꿈틀거렸고/나는 또 몇 날을 새워 기침을 했다/버드나무 가지 끝으로 초경처럼 푸른 물이 오르던/열여섯 봄날/얼룩무늬쐐기나방 한 마리가/내 입을 찢고 세상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수수깡처럼 마른 나는/크게 소리 내서 웃지 않았다/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내 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애벌레들/또다른 무늬로 부화할 꿈을 꾸는데/바람난 그 나방은/어느 나뭇잎에 다시 알을 슬고 있는지
― ('내 안의 얼룩무늬쐐기나방' 전문)
이 시는 시인이 어린 날 몸이 약했고, 어머니보다는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자라났으며, 세상과의 소통보다는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기를 좋아했을 것이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어릴 때부터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다스리는 데 익숙한 내강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애벌레가 날갯짓을 꿈꾸며 꿈틀거리다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날아간다는 시적 구조는 초경을 맞는 과정과 한 편의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리고 사랑의 과정과 구조적으로 닮아있다. 이는 매순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의 구조와도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시인이 표제작으로 삼고 있는 ‘얼룩무늬쐐기나방’은 그것이 고통이면서 순환이라는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 할머니는 세상을 향한 출구이자, 세계인식의 통로가 되는 존재이다. 이 같은 시인과 할머니 사이의 친근은 여러 편의 시에서 느낄 수 있다. 「자작나무 호미」에서 호미는 할머니의 굽은 종아리와 할머니의 손톱으로 변주되며 「나일론 원피스」, 「내 손이 기억한다」, 「할머니 틀니 닦아 드릴게요」 등의 작품에서 할머니는 단순히 시의 대상을 넘어 시인이 세계를 인식하고 내면화해나가는 데 있어 지렛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