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영원이 시작되는 지점처럼 환하게 뚫려 있는” 삶과 사랑이 흐르는 언어의 은하수 별처럼 많은 ‘너’를 잇는 ‘나’의 이야기들 생사가 명멸하는 깊고 아득한 시적 세계 첫 시집에서 “뭇 생명들의 실상”을 탐색하며 탄생과 성장의 서사를 전개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는 성장 이면의 세상으로 서사를 확장시키며 “몸-삶의 흐름이 끊기고 성장이 정지된 세계”의 실상과 “고통스러운 죽음과 소멸”(해설)에 직면한 현대인의 삶을 다양한 측면에서 포착한다. 지난 시절의 “모든/기억은 와르르” “잊어버리는 게 생존의 기술”(「웨이터의 나라」)이 되어버린 냉혹한 자본사회의 인간을 시인은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홀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한밤의 트램펄린」)에 비유한다. 그러나 비상과 추락을 반복하며 도달하는 곳은 결국 제자리일 뿐, 시인은 이러한 제자리걸음을 “어느 날 불편한 자세로 물을 먹다가 사자에게 심장을 바치”고 난 후 “숨을 멈추고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는 버릇”(「이번 생(生)은 기린입니다」)이 생긴 ‘기린’의 생(生)과 다름없음을 직시하고,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게”(「조용한 가족」) 된 소통 부재의 현실과 불화하는 존재들의 고통을 정밀하게 투시한다. 시인은 뭇 생명들이 서로에게 고통 혹은 죽음으로 전이되는 비애의 순간을 감각적인 이미지와 직설적인 표현으로 그려낸다. “갯벌 위 생명들 온데간데없이 사라”(「물의 때」)지고, “돼지가 멀쩡하던 돼지를/소가/젖을 문 송아지와 뿔이 솟은 성난 소를 끌고 가//산 채로/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리고, 급기야 “사람이 사람을/자동차가 자동차를”(「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덮치고 짓이기는 참혹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연이 붕괴되고 죽음과 소멸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죽음은 죽음이 덮쳐오는 줄도 모른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럼에도 시인은 “죽음을 무릅쓰고/누가 나를 낳고 있는”(「처서」) 죽음과 탄생의 역설적 전이, 서로 “다른 시간을 반짝이며/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멈추지 않는”(「그리운 눈사람」) 존재들의 생멸(生滅)의 시간을 차분히 응시한다. “수년째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마을”에서 두돌을 맞은 아기가 “꽃을 가리키며 꽃나무 속으로 빨려 들어”(「살구」)가는 장면에서는 생과 사의 절묘한 공존이 뿜어내는 그윽한 꽃 내음에 흠뻑 취하게 되기도 한다. 상처의 시간을 통과해 다다른 삶의 경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통찰과 냉철한 역사 인식 또한 시집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순천 출신인 시인에게 ‘여순사건’에 관한 시편들은 각별하다. 시인은 “온 천지에 사람이 울고 개구리가 울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초파일에 비」)던 그날, “포승에 엮인/청년 여섯이/총부리 앞에 서 있”(「흰 까마귀가 있는 죽음의 시퀀스」)던 현장을 좀처럼 떠나지 못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곧잘 “묵직한 어떤 사건”이 떠오르고 “어디서 스무발이나 서른발쯤/총소리가 들려”(「구례」)오는 환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 시인은 과거의 ‘몸’에 자신을 대입해 상황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한편, 동시에 현실의 ‘몸’으로 각성해 상처를 보듬어 안는 독특한 문법을 구사한다. 예컨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비극적 현장을 돌아보면서 “아버지 가슴에 총알이 파고드는 것을 보고 있”는 소년이 되어 “한마디 변명도/자비를 바라는 중얼거림도 없는 침묵” 속에서 스러져간 무고한 죽음들의 넋을 기리는 해원의 노래를 부르고, “시신 무더기를 뒤집으며 아들을 찾고 있”(「평화로운 천국」)는 어미가 되어 “죽다가 살아난 사람”(「사라오름」)들의 고통과 함께하는 치유의 노래를 부른다. 시인은 삶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세계를 궁리”(「보아뱀과 오후」)하며 “여전히 나는 기다리는 것이 있”(「그리운 눈사람」)다고 말한다. 시인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마 뭇 생명들이 공존하는 상생의 나라, “생명과 사랑이 흐르는, 흘러야 하는”(해설) 세상 아닐까. “세상의 모든 말이/잘 익은 복숭아 속으로 들어가/옹알옹알/꿀물처럼 미끄러”(「처음의 아이」)지는 영원한 세상 아닐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 세상은//죽은 세상”(「오늘의 갈대」)과 다를 바 없기에 시인은 앞으로도 팽팽한 침묵과 생명의 언어를 벼려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사랑’의 “품을 더 늘려야겠다”(시인의 말)는 시인의 순정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슴속에 여울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