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사회

한병철 · Social Science/Humanities
112p
Where to buy
Rating Graph
Avg3.9(109)
Rate
3.9
Average Rating
(109)
“오늘날 어디서나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고통에 대한 내성도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 고통공포는 만성 마취를 초래한다.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가 회피된다. 사랑의 고통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고통공포는 사회적인 것에도 적용되어 고통스러운 대결을 초래할 수 있는 갈등이나 논쟁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간다. 고통공포는 정치까지 장악한다. 일치 강제와 동의 압박이 심해진다. 정치는 일종의 진통지대에 자리를 잡고 활력을 모조리 상실한다. 탈민주주의가 확산된다. 탈민주주의는 진통적인 민주주의다.” 고통을 밀어낼수록 고통에 더 예민해지고, 죽음을 몰아내려 할수록 좋은 삶에 관한 감각을 상실하는 역설, 생존이 절대화된 생존사회, 고통공포에 포획되어 만성 마취에 빠진 진통사회에 대한 비타협적인 분석. “예리한 산문으로 현대인의 몸에 사유의 칼날을 찔러 넣는” 비수 같은 책이다.

[9주년] 해피 젝시 데이!

젝시믹스 9주년 기념 ~80% 빅 세일

젝시믹스 · AD

Rating Graph
Avg3.9(109)

[9주년] 해피 젝시 데이!

젝시믹스 9주년 기념 ~80% 빅 세일

젝시믹스 · AD

Author/Translator

Comment

10+

Table of Contents

고통공포 행복 강요 생존 고통의 무의미함 고통의 간지 진실로서의 고통 고통의 시학 고통의 변증법 고통의 존재론 고통의 윤리학 마지막 인간 주 역자 후기

Description

고통공포에 포획되어 만성 마취에 빠진 진통사회 생존이 절대화된 생존사회에 대한 비타협적인 분석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독일 철학자’ 한병철 신작 ‘되살아난 그리고 전례 없이 읽기 좋은 독일 철학의 귀재’(〈가디언〉),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살아 있는 독일 철학자’(〈엘파이스〉)로 불리는 사회비평가 한병철.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착취에 대해(《피로사회》), 전체주의로 기울기 쉬운 투명성의 위험에 대해(《투명사회》),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 착취에 대해(《심리정치》), 그리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세계에 대해(《타자의 추방》) 날카로운 비판을 선보이며 출간하는 책마다 열띤 논쟁을 불러온 그가 신작 《고통 없는 사회》에서 다시 한번 오늘의 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그가 바라본 세계의 현실은 고통을 회피하며 진통제를 움켜쥐는 ‘진통사회’,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들을 상실하면서까지 생존에 진력하는 ‘생존사회’다. COVID19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던 2020년 7월 독일에서 출간되고,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생존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다“ 고통을 ”암호“이자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로 삼아 고통의 해석 작업을 통해 사회 비판을 수행하는 저자에게 오늘의 세계는 고통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은 모든 고통을, 심지어는 사랑의 고통조차 회피한다. ”아픔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데이트 포털의 문구로 사용되는 세상(51쪽)에서, 고통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통을 삶에서 지워버리려 할수록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민감해진다. 마약성 진통제의 오남용으로 인한 약물중독으로 한 해에만 수만 명을 사망으로 몰고 간 미국의 오피오이드 사태에서 보듯 진통제가 남용되며, ‘좋아요’ 일색인 소셜미디어는 물론이고 예술조차 진통제로 작용한다. 정치에서도 고통스러운 토론은 사라진다. 논쟁하고 더 나은 논거를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막연한 ‘중도’의 진통지대에서 몸을 사린다. 원제 그대로 ‘진통사회(Palliativgesellschaft)’요, 생존이 제일가는 가치로 여겨지는 ‘생존사회’다. 진통사회에서는 삶의 진실, 좋은 삶에 대한 전망, 새로운 예술, 타자와의 관계,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기실 이 모든 것의 계기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 대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등극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불멸하는 신인류의 세상, 모든 고통이 사라진 세상이 올 수도 있겠지만, 인류는 진짜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탈정치화한다“ 위와 같은 성격을 지닌 ‘진통사회’는 ”모든 부정성의 형식을 떨쳐내고자 하는 긍정성의 사회“(10쪽)의 당연한 귀결이다. 저자가 그간 일관되게 지적해온, 성과주체가 끊임없이 자기착취를 통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는 이제 진통사회라는 형식을 띤다. 성과사회는 ‘행복하라’를 새로운 지배공식으로 삼으며, 유행하는 긍정심리학이나 행복 담론들은 실은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복무한다. “행복의 긍정성이 고통의 부정성을 밀어낸다.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 자본으로서 성과 능력이 약화되지 않고 계속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는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가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해주는데, 큰 비용을 전혀 치르지 않고도 지배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21쪽)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의 문제점은 우리의 시선을 내면으로만 향하게 하여 현존하는 지배관계를 보지 못하게 만들며,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고통”을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21쪽) 아울러 고통을 무조건 퇴치하고자 하는 의지는 고통이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며, 고통이 언어화되고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23쪽) “행복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24쪽) 작금의 팬데믹 상황이 사회 시스템의 혁명적 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하는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과 사뭇 다른 인식인데, 이는 그가 고통을 사적인 문제, 의학적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하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에 읽는 고통의 철학 책에는 팬데믹 상황에 대한 저자의 날카롭고 흥미로운 진단이 곳곳에 등장한다. 바이러스 유행은 적의 부정성, 면역학적 방벽이 사라진 성과사회에 다시금 부정적인 것이 침투한 것, 이른바 “적의 귀환”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32쪽) 이런 국면에서는 공항의 검색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잠재적인 바이러스 운반자로 의심받으며 잠재적 테러리스트처럼 취급된다. “격리 사회가 생겨나며, 생명정치적 감시 체제가 수립된다. 팬데믹은 어떤 다른 삶의 형태를 낳지 않는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생존이 된다. 생존의 히스테리는 바이러스를 통해 첨예화된다.”(33쪽)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생존을 위해 보류된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부활절 예배조차 중단되고, 신학은 바이러스학에 현실에 대한 해석주권을 넘겨준다. 이웃 사랑은 이웃에 대한 거리두기의 모습을 취한다.(29쪽) “홈오피스는 팬데믹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강제노동수용소를 부르는 이름”(28쪽)이다. “팬데믹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반서사를 낳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감속되지 않고 강제적으로 정지될 뿐이다. 초조한 정지가 지배한다. 격리는 여가가 아니라 강제된 활동 정지만 낳는다.”(31쪽) 팬데믹에 직면한 세상은 “생명정치적 감시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88쪽) 과거 인구조사 시기엔 데이터 수집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있었으나, 이 시대엔 내밀한 개인 정보까지 내놓으며 방역을 위한 당국의 지침에 저항 없이 순응한다. 우리는 왜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가 다각도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에 대한 분석은 ‘고통의 윤리’에 관한 성찰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폭력과 고통의 영상을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왜 점점 더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질까? 소비사회의 개인들은 넘쳐나는 폭력 이미지들에 대해 포르노그래피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폭력의 포르노는 살인조차 고통 없는 사건으로 만든다. 포르노그래피적인 폭력 영상은 진통제처럼 작용한다. 이런 영상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둔감해지도록 한다.”(79쪽) 갈수록 공감 능력이 줄어드는 현상은 “타자의 소멸이라는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진통사회는 고통으로서의 타자를 제거한다. 타자는 대상으로 사물화된다. 대상이 된 타자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80쪽)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 내게 고통을 주는 타자에 대해 내가 무방비적으로 고통스럽게 노출되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특히 팬데믹 시대에 타자의 고통은 사건의 수로 해체될 뿐이다. “우리의 영혼은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고 둔감하게 만드는 굳은살로 온통 뒤덮인 듯하다. 디지털 거품 또한 우리를 타자로부터 점점 더 격리한다. 타인으로 인한 분명한 두려움이 자신으로 인한 산만한 두려움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타자로 인한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도 전혀 접근할 수 없다.”(84쪽) 예리한 산문으로 사유의 칼날을 찔러 넣는 비수 같은 책 책은 고통에 관한 에른스트 융어의 텍스트를 비롯해 하이데거, 니체, 벤야민, 아도르노, 푸코, 헤겔, 아감벤, 바디우, 폴 발레리, 프루스트, 엘리아스 카네티, 샹탈 무페, 에바 일루즈, 프랜시스 후쿠야마, 트랜스휴머니스트인 데이비드 피어스 등을 두루 호명,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오늘

Collections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