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조르조 아감벤 and other
1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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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와 비평’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인류의 잠재성을 더 많이, 더 풍부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해주리라던 온갖 기제들이 도리어 어떻게 인류에게서 그 본질이나 역량을 빼앗아가게 되는지, 그리고 현대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탐구하는 문제작이다.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아니듯이, 아감벤이 말하는 장치 역시 어떤 기계나 도구의 총체가 아니다. 오히려 아감벤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권력과의 연관성이 명백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규율, 법적 조치 등”뿐만 아니라 그 연관성이 은폐되어 있는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인터넷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언어 자체”도 장치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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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기획의 말 '에세이와 비평'을 펴내며 Essai 조르조 아감벤 1. 장치란 무엇인가? 2. 친구 3.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2 Critique 양창렬 1. 장치학을 위한 서론 부록 1. 장치란 무엇인가? 강연[발췌] 2. 더 읽을만한 자료들 3. 찾아보기

Description

오늘날 또 하나의 ‘자연’이 된 장치를 분석한다 오늘날에는 개인이 살아가면서 어떤 장치의 주조·오염·제어를 겪지 않을 때는 단 한 순간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상황과 대결할 수 있을까? 장치들과의 일상적인 맞대결에서 어떤 전략을 따라야 할까 1960년대 초 캐나다의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개인용 컴퓨터에서 아이폰까지 전례 없는 미디어의 폭발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맥루한의 주장처럼 현대인들은 각종 미디어 덕택에 그만큼 더 자신의 감각, 정신, 육체를 확장시켰을까? 도서출판 난장의 신간 은 인류의 잠재성을 더 많이, 더 풍부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해주리라던 온갖 기제들이 도리어 어떻게 인류에게서 그 본질이나 역량을 빼앗아가게 되는지, 그리고 현대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탐구하는 문제작이다.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아니듯이, 아감벤이 말하는 장치 역시 어떤 기계나 도구의 총체가 아니다. 오히려 아감벤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권력과의 연관성이 명백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규율, 법적 조치 등”뿐만 아니라 그 연관성이 은폐되어 있는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인터넷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언어 자체”도 장치에 속한다. 요컨대 현대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큼 충분히 자기 행동의 ‘의식적 동인(動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움직이는 진정한 동인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감벤은 산업혁명 시기의 러다이트(기계파괴자들)처럼 단순히 모든 장치를 파괴하려 든다거나, 순진한 사람들이 제안하듯이 장치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열쇠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미 현대인들의 ‘자연’이 되어버린 장치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오늘날의 진정한 과제이다. 그리고 그 재정립의 핵심은 장치들이 우리로부터 포획?분리해간 인간으로서의 잠재성(역량)을 해방시켜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것이다. 아감벤은 오늘날 거의 신성화되다시피 한 장치들로부터 해방되는 이 과정/방법을 ‘세속화’라고 부른다. 규율사회(미셸 푸코)에서 통제사회(질 들뢰즈)로 넘어온 오늘날 이제 현대인들은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체로서 관리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국내에서도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생체신원증?전자주민증 같은 생체인식 장치는 그 최근의 사례일 뿐이다. ‘장치’와의 관계 재정립이라는 문제의식이 한갓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피할 수 없는 화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사유의 실험, ‘에세이와 비평’ 시리즈 에세이란 본디 밖으로 끌어내고, 무게를 재보고, 시도해본다는 라틴어 ‘엑사지움’(exagium)에서 유래한 말이다. 자신이 마주 하고 있는 텍스트에 담긴 잠재력을 끌어내고 무한한 사유의 무게를 재는 ‘비평’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에세이’이기도 하다. 은 도서출판 난장이 새롭게 선보이는 ‘에세이와 비평’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이다. 비록 문고판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이 시리즈는 한창 유행 중인 다이제스트 판이 아니다. 요컨대 이 시리즈의 목표는 어떤 사유나 주제를 ‘알기 쉽게’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에세이의 원래 의미에 충실한 시리즈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놀람으로써 지혜를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놀라움의 대상에 관하여 사유해왔다. 바로 그 결과물이 에세이이다. 그러므로 이 시리즈의 비평 역시 에세이의 지은이가 사유한 ‘세상의 놀라움’에 기꺼이 직접 마주서려고 하며, 그래서 그 자체로 한 편의 에세이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리즈에는 두 명의 지은이가 존재한다('기획의 말: ‘에세이와 비평’을 펴내며', 9~11쪽 참조). 이런 의도에 걸맞게 양창렬의 '장치학을 위한 서론'은 아감벤이 제기한 ‘장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풀이해주기보다는 자기의 문제의식 속에서 끝까지 밀어붙인다. 장치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이중의 분리’를 통해 생명체를 주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첫째, 장치는 생명체로부터 그 고유의 역량을 분리해낸다. 가령 대중매체는 대중의 의사표현 가능성을 빼앗아간다. 신문과 포털사이트에는 우리가 내뱉으려던 ‘분노’가 이미 기사화되어 있고, 각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는 자막이 우리가 ‘웃을’ 타이밍을 미리 알려주는 식이다. 그렇다면 분노하고 웃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둘째, 장치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형태를 분리해낸다. 가령 장치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 역시 박물관 안의 유리진열장에 전시되는 사물로 뒤바꿔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를,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을 직접 겪을 수 없다. 그저 장치가 ‘매개’해주는 방식대로만 수동적이고 간접적으로 겪게 된다. 따라서 얄궂게도 장치가 만들어내는 주체는 어원 그대로의 주체가 아니다. 주체의 어원인 라틴어 ‘수비엑툼’(subjectum)은 그리스어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의 번역어로서 원래 ‘본질’(본래 사물을 그 사물로서 형성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뜻했다. 그러나 장치가 만들어내는 주체는 이런 본질로서의 주체라기보다는 장치가 뽑아내려고 겨냥한 어떤 ‘기능’을 구현한 ‘부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치가 부여한 이 기능을 거부할 때, 단순한 부품이기를 그만두려고 할 때 장치는 그 주체를 클리넥스 티슈처럼 버려버린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크나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장치가 만들어낸 주체의 가장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규직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부터 대체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양창렬에 따르면 아감벤 역시 장치에 의한 주체화가 사실은 모든 주체성의 파괴로 이어지는 탈주체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세속화’라는 개념을 통해 탈주체화가 인간이 지닌 잠재성 회복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아감벤과 달리, 양창렬은 장치의 탈주체화 탓에 서로 분리된 존재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요컨대 법적으로 시민이지만 사회적으로 시민 취급을 못 받는 시민-비시민(쓰다 버릴 수 있는 인간, 비정규직)과 비시민으로 배제되면서도 시민의 역할을 강제받는 비시민-시민(외국인 노동자, 불법체류자 등)의 연대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 갈래의 사유 중 어느 쪽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게 아니다. ‘에세이와 비평’ 시리즈의 각 권이 묻는 질문은 독자의 본인의 마주섬에 의해서만 비로소 종결(또는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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