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이상각 · History
5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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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자료에 연구자들의 새로운 해석을 가미한 이상각의 <고려사>.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고려사를 정사로 읽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려와 원 제국의 관계에 주목한다. 약소국 고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원 제국의 강대한 무력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오랜 항쟁과 타협, 조정 과정을 거쳐 백여 년 동안의 평화를 구가했다는 것은 실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은 1장 '민족 통합의 새 아침을 열다-고려의 건국과 국가 체제의 정비', 2장 '불굴의 민족혼을 떨쳐 일으키다-요의 침공과 원교근공의 삼각 외교', 3장 '태평성대의 주춧돌을 심다-각종 제도의 확립과 선진 문물의 도입', 4장 '머나먼 평화의 길 -금의 압력과 무신정권의 출현', 5장 '세계제국의 동반자가 되다-몽고의 침공과 항쟁, 제국과의 밀월'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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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머리글 제1장 민족 통합의 새 아침을 열다 -고려의 건국과 국가 체제의 정비 제1대 태조 보육 설화 | 작제건과 용녀 설화 | 고승 도선 설화 | 고려 기원설화에 대한 이제현의 비판 | 개국 이전 | 후삼국 시대의 개막 | 왕건의 등장 | 궁예의 독주와 태봉의 멸망 | 개국과 통일 | 관제의 정비와 북방 정책 | 변화하는 국제정세 | 힘겨운 통일 전쟁 | 대야성 전투 | 공산 전투 | 병산 전투 | 임진 해전 | 운주 전투 | 후백제의 내분 | 최후의 통일 전쟁 일선 전투 | 통일 이후 | 거란과의 불화 | 영웅의 최후 | 태조의 가족 | 토성분정과 본관제 | 지방행정제도의 개편 | 호족들에대한 회유와 견제 | 사심관 제도 / 기인 제도 | 불교 진흥 정책 | 팔관회 / 연등회 | 태조의 유훈, 훈요십조 | 훈요십조 위조 논란 | 태조 시대의 주요 인물 |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도선 제2대 혜종 민활한 외교정책 수행 | 왕권 분쟁과 혜종의 고립 | 그날 이후 | 혜종의 가족 제3대 정종 무일의 시대 | 서경 천도 계획과 광군 창설 | 죽음의 징조 | 정종의 가족 제4대 광종 평화 시대의 개막 | 노비안검법 | 과거 제도 | 공포 시대의 도래 | 신세대와 귀화인들의 약진 | 균여의 불교 통합 | 평주 세력 척결 | 정수의 균여 고발사건 | 고독한 독재자의 최후 | 광종의 가족 제5대 경종 보복 정치의 폐해 | 전시과 | 짧은 경종의 치세 | 경종의 가족 | 고려 초기 정국의 타파책 근친혼 제2장 불굴의 민족혼을 떨쳐 일으키다 -요의 침공과 원교근공의 삼각 외교 제6대 성종 최승로의 시무이십팔조 | 중앙관제의 확립과 지방행정제도의 개편 | 유학의 진흥 | 요의 1차 침공과 강동 6주 획득 | 요, 송, 고려의 삼각 외교 | 성종의 가족 | 성종시대의 주요 인물 | 올바른 신하 상을 정립한 김심언 / 냉철한 외교전략가 서희 제7대 목종 태후의 섭정 시대 | 김치양의 득세 | 대량원군 왕순의 반격 | 강조의 변심과 목종의 최후 | 거대불상의 출현 제8대 현종 군현제의 확립과 고려의 안정 | 요의 2차 침공 | 전후복구사업과 무관들의 반발 | 요의 3차 침공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 평화시대의 도래 | 현종의 가족 | 군현제도의 확립 | 군사제도의 확립 | 현종 시대의 주요 인물 | 귀주대첩의 노익장, 강감찬 / 현종의 경호대장 지채문 제9대 덕종 요에 대한 공세 | 과거제 확립과 실록의 복원 | 덕종의 가족 제10대 정종 평화시대의 유비무환 | 거듭되는 천재지변과 성군의 요절 | 정종의 가족 제3장 태평성대의 주춧돌을 심다 -각종 제도의 확립과 선진 문물의 도입 제11대 문종 각종 법률의 정비 | 경정전시과의 시행 | 고려, 요, 북송의 삼국시대 | 북송과의 국교 재개와 벽란도의 융성 | 군사력의 강화와 여진 정벌 | 유교와 불교의 진흥 | 문종의 가족 | 문종 시대의 주요 인물 | 사립학교의 창시자 최충 / 문종 치세의 일등공신 이자연 제12대 순종 순종의 가족 | 과거 제도 | 음서 제도 제13대 선종 불교와 유교의 발전 | 동아시아 외교 주도 | 선종의 가족 | 선종 시대의 주요 인물 | 천태종의 시조 대각국사 의천 제14대 헌종 계림공 왕희의 보위 찬탈 제15대 숙종 초기의 태평성대 | 별무반 편성 | 숙종의 가족 제16대 예종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 9성의 반환 | 금의 건국과 북방 정세의 불안 | 유학의 진흥과 내정의 안정 | 시인 예종의 낭만 | 예종의 가족 | 고려 문화의 꽃 청자의 절정시대 | 예종 시대의 주요 인물 | 냉철한 현실주의자 김인존 제4장 머나먼 평화의 길 -금의 압력과 무신정권의 출현 제17대 인종 국제 정세의 변화 | 한안인의 실각 | 친위쿠데타의 실패와 인종의 위기 | 요의 멸망, 금과의 화친 | 이자겸의 난 | 서경파의 약진과 천도 계획의 추진 | 묘청의 난 | 동북아의 안정과 인종의 죽음 | 인종의 가족 | 인종 시대의 주요 인물 | 개경 세력의 주역, 김부식 / 「고려도경」의 주인공 서긍 제18대 의종 연이은 역모와 문신들과의 불화 | 의종의 사치와 정사의 실종 | 의종의 방종과 백성들의 눈물 | 간신들의 득세와 의종의 착각 | 보현원의 참극과 의종의 최후 | 의종의 가족 | 의종 시대의 주요 인물 | 환관정치의 주역 정함 제19대 명종 이의방의 권력 독점 | 문신들의 반격 | 정중부의 집권 | 망이와 망소이의 난 | 정중부의 피살, 경대승의 집권 5년 | 명종의 일탈 | 전주 관노의 난 | 이의민의 무소불위 13년 | 효심과 김사미의 난 | 최충헌과 최충수의 정변 | 봉사 10조 | 명종의 퇴위 | 명종의 가족 제20대 신종 형제간의 권력 다툼 | 만적의 난 | 이어지는 민란 | 신종의 가족 | 신종 시대의 주요 인물 | 고려 선종의 중흥조 지눌 제21대 희종 최충헌의 독주와 교정도감의 설치 | 최충헌 암살 작전 | 희종의 가족 제22대 강종 강종의 가족 | 유라시아를 휩쓴 대제국 몽고의 쓰나미 제5장 세계제국의 동반자가 되다 -몽고의

Description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을 정사로 읽는다 고려는 건국 이후 삼한을 일통했다는 긍지를 바탕으로 제국 체제를 지향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후당, 후진, 송, 요, 금 등 대륙의 실세들과 조공과 책봉 관계를 통해 사대자소(事大字小)라는 전통적인 외교 관례를 수용함으로써 중원 국가들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보장받았다. 고려는 또 중앙과 지방간에 유기적인 연대를 통해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민족의 내부 통합을 일궈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의 외척과 문벌세력이 등장해 위세를 떨쳤지만 향리 등 지방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사대부 집단도 동시에 형성되어 균형을 맞추었다. 사회적으로는 국적과 종족을 가리지 않고 관리로 임용했던 개방성, 하층민의 활발한 이동에서 비롯된 역동성, 불교·유교·도교·풍수지리·도참사상 등 여러 사상을 공존시킨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머리글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 고려는 잦은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끈질긴 항쟁을 통해 국체를 보존했던 열정과 자존의 제국이었다. 하지만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관련 사료가 드물거니와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은 후대의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양한 사료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 저간의 오류가 많이 시정되었다. 이상각의 『고려사』는 기존의 자료에 연구자들의 새로운 해석을 가미한 것으로 역동적인 고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저작이다. 고려의 건국과 국가 체제의 정비 병산전투는 그동안 후백제에 밀리던 고려가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은 계기가 되었다. 후백제군이 물러나자 태조는 김선필의 주선으로 서라벌에 가서 신라의 경순왕과 신하들을 위로했다. 그와 같은 왕건의 신라에 대한 배려는 왕족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고려에 적대적이었던 호족들까지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궁예의 축출 이후 태조에 반기를 들었던 강릉의 김순식, 의성의 홍술, 포천의 성달 등이 고려에 귀순하고 울산과 주변 110여 성까지 항복해 왔다.(p.44)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가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신라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각지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했고 마침내 고려, 후백제, 신라로 대표되는 후삼국 시대가 정립되었다. 당시 신라는 이미 주도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후백제와 고려는 패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던 상황이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삼한일통을 이뤘다. 이는 단순히 무력에만 의지한 결과가 아니었다. 왕건이 통합과 안정을 희구하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읽어냈기 때문이다. 저자는 태조 왕건에 관련된 설화를 비롯하여 혼인정책, 사성정책 등 다양한 사실을 통해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 주목한다. 연합체적인 성격으로 시작한 고려의 초기 과제는 호족들을 통합하여 중앙집권체제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광종대를 거쳐 성종대에 이르면서 고려의 정치체제는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리고 실리외교를 추구함으로써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은 가급적 피하였다. 성종이 고려의 체제 정비와 문화개혁을 서두르고 있는 동안 요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985년 요가 여진을 정벌하고 발해의 후신인 정안국까지 점령하자 북송은 사신 한국화를 고려에 보내 요를 양면에서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요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북송은 전쟁 중에 노획한 포로나 재화, 병기 등을 모두 고려에게 넘겨주겠다고 유혹했지만 성종은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출병하지 않았다.(p.107) 그 무렵 요와 고려는 뜨뜻미지근한 형식적 사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된 사실을 알게 된 요는 더 이상 침략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문종은 요가 강제 점유하고 있는 압록강 동쪽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당시 요에서는 흥종 사망 이후 도종 야율홍기(耶律洪基)가 즉위하면서 황실의 내분이 벌어져 문종의 요구에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문종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축하사절단에 항의문을 함께 보내는 등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1057년에는 중서성을 통해 궁구문 바깥에 있는 우정을 없애고 송령 동북지대에 토지 개간사업을 하는 자들과 이미 설치한 암자들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이와 같은 문종의 강수는 요와 일전을 겨루어도 꿀릴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문화강국 북송에 대하여 문종은 매우 친밀하게 대했다. 요의 압력으로 인해 양국은 오래전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지만 문종은 북송 상인들의 국내 출입을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선진문물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그 무렵 왕안석의 신법을 통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북송에서는 매년 주조하는 동전과 철전이 600만 관을 넘었고 남양, 인도양, 아프리카 동해안의 등지에서도 사용되었다.(p.164∼165) 열정과 자존의 불꽃이 지다 요와 금이 등장하자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했다. 이에 고려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군사력을 강화했고 그들의 발전된 문화를 수용하는 등 민첩하면서도 합리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갈등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려는 초기에 문벌귀족사회를 형성했고 권력에서 배제된 무신들은 홀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넘쳐나는 무신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정변으로 표출되었고 그 후 100여 년동안 무신집권체제가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민중의 사회의식은 성장해 나갔다. 만적은 보잘것없는 벼슬아치였던 주인 최충헌이 정변을 통해 당대의 최고 권력자가 된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자신도 비록 천한 신분이지만 거사에 한번 성공하면 권좌에 오를 수 있다는 망상을 품게 되었다. “정중부와 김보당 이래 고관 중에 천출이 한둘이 아니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p.272) 본래 고려는 사족과 서인을 구별하는 사서제(士庶制)와 양인과 천민을 구별하는 양천제(良賤制)를 두 축으로 유학자 중심의 귀족사회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신정권시대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평민과 노비의 신분 상승에 따라 사서제 기능이 상실되었고, 양천제도 원의 영향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돈의 노비개혁정책은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졌지만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제도의 벽과 수구세력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p.448) 원의 영향력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 고려는 과감한 개혁정치를 시도한다. 특히 공민왕대에 이르러 괄목할만한 개혁이 이루어졌고 더불어 사회체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정방의 폐지나 토지, 노비에 관한 개혁정책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역사는 이성계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한다. 당시 이성계는 요동 정벌 당시 4불가론을 내세우며 정벌의 부당성을 설파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은 옳지 않다. 셋째, 왜구들에게 빈틈을 보이게 된다. 넷째, 장마철이라 활에 입힌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번질 우려가 있다.(p.478) 결국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고 쿠데타는 성공한다.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조민수 등 군부 세력은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보위에 올렸다. 개혁파의 독주에 제동을 건 이색, 정몽주 등은 고려의 국체를 보존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반 이성계파의 모든 저항은 끝났고 고려도 함께 멸망했다. 불굴의 민족혼을 떨쳐 일으키다 저자는 고려와 원 제국의 관계에 주목한다. 약소국 고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원 제국의 강대한 무력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오랜 항쟁과 타협, 조정 과정을 거쳐 백여 년 동안의 평화를 구가했다는 것은 실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의 그늘 아래 안주하면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