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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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합리적 인식이란 무엇인가? ―불교인식논리학의 완성자 다르마키르티에 관한 본격 연구서 이 책은 인도불교의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불교인식론의 과제를 논리적으로 완성한 다르마키르티(Dharmak?rti, 法稱, 600~660)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서이다. 주체와 대상을 실체로 인정하는 사유 전통에 반대하면서 무아론(無我論)에 근거한 인식이론을 종합해 불교의 언어적 방편을 전면에 내세운 다르마키르티는 ‘그 이후의 인도불교는 그에 대한 각주’라고 평가될 만큼 불교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다르마키르티의 사상을 체계화한 이 책은 그에 대한 평가를 유도함과 동시에 오늘날 불교인식논리학의 합리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불교철학의 학문적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할 만한 저서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같은 인도의 사상가인 나가르주나(2세기에 활동)에 비하면 다르마키르티(7세기에 활동)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상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다르마키르티는 나가르주나의 공(空) 사상뿐만 아니라 바수반두의 찰나멸 이론, 디그나가의 인식논리와 언어이론을 근간으로 하여 불교인식논리학의 사유체계를 완성한 독보적인 존재이다. 이미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를 비롯한 서양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을 정도이다. 때문에 이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중관사상과 유식사상 등에 집중되어 있는 불교 연구의 학문적 과제를 다각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인 면만큼이나 이 책을 빛나게 하는 지점은 “왜 철학하면서 성스럽게 되지 못하는가?”, “왜 종교인이면서 합리적인 인간을 동시에 구현할 수 없는가?” 하는 다르마키르티의 문제의식이다. 이 책은 해탈은 절대자에게 의존하거나 순수자아로의 초월이 아닌 ‘바른 인식’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는 다르마키르티의 주장을 통해 ‘불신(不信)이 아니라 맹목(盲目)이 지옥’이 된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는 세태에 합리적 인식이 구원을 낳는다는 불교적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인도불교의 인식론 전통을 꿰뚫다 이 책은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이 인도 전통의 인식론을 수용하거나 반대한 관계를 고찰하여 그가 어떻게 인도불교의 인식론 전통을 완성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다르마키르티가 인식론과 논리학을 해탈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점은 인도의 육파사상(고대 인도의 6가지 철학체계의 총칭. 상키야·요가·니야야·바이세시카·미망사·베단타 학파의 사상)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인도의 육파사상이 불변의 인식주체를 상정하는 아견(我見)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 다르마키르티는 무아견(無我見)을 근간으로 한 인식론을 주장한다. 이것은 경량부(輕量部, 인도 소승불교의 부파)의 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주체는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생성되는 찰나적·연기적 존재이며, 결국 인식과 존재의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이러한 경량부뿐만 아니라 디그나가의 논리학과 언어철학을 수용하는 한편 자비, 공, 찰나멸, 아포하(apoha) 등 다양한 불교이론을 자신만의 사상으로 완성해 간다. 이렇게 다르마키르티가 이해한 범주는 원시불교에서 시작하여 경량부의 외계실재론, 유식의 표상주의, 중관의 부정적 비판주의, 디그나가의 인식논리학까지(본문 51쪽) 이르며, 이는 당시의 불교인식론을 모두 소화한 과정이다. 그리고 다르마키르티는 이를 7부의 프라마나론으로 완성하였다―『프라마나바르티카』, 『프라마나비니쉬차야』, 『니야야빈두』, 『헤투빈두』, 『바다니야야』, 『삼반다파리크사』, 『산타나안타라싯디』. 이 저작들은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다르마키르티 연구자 슈타인켈너가 “그의 텍스트는 한 줄 한 줄이 분명한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의 연구자들이 그의 문장 속에서 정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없다면 그건 다르마키르티의 잘못이 아니고 해석자인 연구자의 잘못”(「법보신문」, 2004년 5월 17일자 인터뷰)이라고 평할 정도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도 논리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다. 또 『프라마나바르티카』를 비롯한 그의 저작 7권이 오늘날까지 모두 전해지고 있어 다르마키르티 사유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7부의 프라마나론은 그 자체로 다르마키르티와 인도불교인식론의 정통이라 할 만하다. 다르마키르티로 보는 불교인식론 다르마키르티가 활약했던 7세기는 인도에서 아론이 득세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자기동일성을 본질로 하는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고 분별을 통해 그것을 사유하는 아론자들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을 정합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론자들은 분별되어 단절된 존재, 인식, 행위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형이상학적으로 추상된 절대적 존재나 절대정신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일상적 삶으로부터 종교를 더욱더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이 다르마키르티가 합리적 종교를 구현하고자 한 이유였다. 다르마키르티에게 있어 인식이란 대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었고, 그는 올바른 인식수단(프라마나)인 지각과 추리를 통해 그것을 체득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에 더하여 앎(인식)으로 인한 행(行)이 일회적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사실도 다르마키르티는 알고 있었다. 여기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불교였다. 다르마키르티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에 대한 앎을 통해 성스러움에 이를 수 있는 불교의 합리성에 주목하여 불교인식론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내는 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대상이란 무엇인가 다르마키르티에게 대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주체에게 인식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형상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마키르티는 이런 형상 부여를 ‘인과적 효과성’이라 표현하며, 대상을 찰나멸하는 존재로서 파악한다. 인도의 아론자들은 “인식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인식되지 않는다”며, 대상 없는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러나 실체 없는 대상을 주장하는 다르마키르티는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식의 주체를 변화시키는 인과적 효력을 발휘하는 정합성과 새로운 인식을 생기게 하는 새로움(미지의 대상)을 갖추어야만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인식주체뿐 아니라 인식대상 역시 찰나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끊임없이 찰나멸하는 인식대상은 무(無)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 속에서 다른 존재, 새로운 자기로 거듭난다. 지각이란 무엇인가 다르마키르티는 대상을 바르게 아는 것을 인식이라 하였고 이를 위해서 올바른 인식수단인 지각과 추리를 제시하였다. 다르마키르티는 지각을 “분별을 떠난 것, 착각이 아닌 것”이라 정의하여 인도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분별’(다르마키르티에게 이것은 개념의 구성이다)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했으며, 궁극적 차원에서는 자상(自相)을 인식하는 지각만이 존재한다('프라마나바르티카' 3장 53게송)고 하였다. 그 이유는 자상만이 인과적 효과성이 있고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지각이야말로 존재와 인식을 연결해 주는 가장 근원적인 경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마키르티는 지각을 절대적 인식수단으로 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무시 이래로 훈습된 명언종자(名言種子)에 의해 우리의 지각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르마키르티는 지각과 함께 추리를 인식수단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언어를 매개로 한 추리를 통해 잘못된 인식을 정련해 갈 때 우리의 지각은 왜곡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종교적 도그마를 극복하는 불교인식론 오대양 집단자살사건(오대양의 대표이자 교주 박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