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떻게 태어나 사는가?
안도현 시인의 ‘시와 연애하는 법’
좋은 시는 어떻게 쓰는가?
시인 안도현이 자신의 ‘시 창작 강의노트’라 할 수 있는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를 출간했다. 안도현이 “고등학교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까까머리 문학소년”이 된 계기는 1978년 학원문학상을 받으면서부터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황동규 시인과 고故 김현은 “앞으로 한국의 좋은 시인 하나를 가지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남겼는데, 시인은 지난 30년 동안 그들의 격려를 녹록치 않은 시적 성취로 화답했고, 이제는 이 책과 더불어 ‘좋은 시인’을 넘어선 ‘좋은 시 선생’이라는 호칭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꿈”을 꾼 지 꼭 30년이 되던 지난 2008년, ‘시와 연애하는 법’이라는 타이틀로 6개월 동안 '한겨레'에 연재했던 원고를 대폭 손질하고, 내용을 보강해 묶은 이 책은 ‘좋은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지’, ‘좋은 시는 어떻게 쓰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시작법 책인 동시에 오랜 세월 시마詩魔와 동숙해온 시인 자신의 시적 사유의 고갱이들이 담겨 있다.
상투적이지 않으면서 친숙하게 핵심을 짚어주는 시작법론
이 책에 ‘좋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한 비법이 수능시험 답안지처럼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 없다고 하며, 자신은 그저 ‘시적인 것’을 탐색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은 곧잘 ‘시적인 것’이 아닌 것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워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94쪽)
또한 안도현은 시가 가장 피해야 할 것으로 ‘상투성’을 꼽는데, 그의 시에 대해 “쉽게 읽히면서도 상투적이지 않고 오랜 감동을 준다”는 세간의 평가가 많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시작론인 이 책에서도 상투성과 난해함이라는 두 장애물을 세련되게 피해가며 시의 내용과 형식이 취해야 할 것의 핵심을 짚어준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신이 ‘문학소년’ 시절부터 오랜 세월 시를 쓰고자 하는 열병을 겪어왔고, 중고등학교 교사 시절과 지금의 시 창작 수업을 통해 수많은 문청들이 시의 세계에 발 딛는 데 징검돌을 놓아준 경험을 통해, 그들의 눈높이를 맞춰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탄생하는 현장을 바라보다
그리하여‘시가 탄생하는 순간’에 대한 시인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시작법을 설명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책 속에 녹아 있고, 시인 자신의 시 창작에 얽힌 사연과 경험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 된다. 시인은 고등학교 시절에 쓴 시를 부끄러이 공개하면서, 자신이 골랐던 시어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기도 하고, 급기야 화장실에서 떠오른 시상 메모가 어떻게 한 편의 시로 탄생하는지 그 과정과 흔적을 소상히 서술한다. 안도현의 시 중에 가장 널린 알려진 것 중 하나가 - ‘연탄재’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너에게 묻는다」라는 짧은 시인데, 이 시에 얽힌 뒷얘기도 재밌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전문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가을’을 내 방식으로 인식하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연탄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어릴 적에 내 자취방 부엌에는 늘 연탄이 있었다. 언덕 위에 있던 그 자취방을 나와 학교로 가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이면 눈 녹은 물이 비탈길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는 누군가 어김없이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놓곤 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41~42쪽)
쉽게 읽혀지면서도 ‘관계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묵직한 통찰을 담고 있는 단 세 줄의 이 시는 어느 한 순간 쉽사리 씌어진 듯 오해할 수 있지만,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시적 경험을 바탕으로 수없는 ‘행갈이’의 시행착오와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쩨쩨하고 치사한” 고민 끝에 한 편의 시로 세상에 탄생한 것이다. 시인은 어느 시집 후기에선가 “시가 나를 끌고 다녔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듯 이 책 곳곳에는 ‘시가 그를 어떻게 끌고 다녔는지‘에 대한 흔적이 담겨 있고, 그렇게 자신의 시 창작 경험을 드러내며 ‘시적인 것’에 다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을 통해 시와 친해지는 법
이 책이 염두에 두고 있는 첫 번째 독자는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와 더불어 이 책은 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 시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들 모두가 기꺼이 읽을 수 있는 시 입문서로서의 노릇도 적절해 보인다. 그 동안에도 한국 시인들의 좋은 시를 소개하는 작업을 통해 시의 대중화에 고민해온 안도현 시인은 책의 서문에 “독자들께 시작법과 더불어 한국어로 쓴 시의 정수를 맛보는 즐거움을 과외로 선사하고 싶었다”라며 책 속에 좋은 시의 증표로 삼을 만한 100여 편의 시를 소개한다. 또한 이 시들이 왜 좋은 시인지에 대한 시인의 도움말은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시독법’과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어 독자들이 시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자연스럽게 마련할 것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물론이고 시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시라는 세계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 답답해했던 사람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에 대한 안목을 기르고 싶었던 사람들, 어떤 시인, 어떤 시집을 읽으면 좋을지 막막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이 맞춤한 시 안내서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아래 글은 위의 책 소개와는 별개로 저자 안도현 선생이 책의 출간에 즈음하여 편집자와 이 책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 대해 이메일을 통해 주고받은 이야기이다.
* 이 책의 출간 계기는?
시작 활동과 창작 강의를 하면서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이 ‘시작법’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보았다. 이 책은 나의 경험을 풀어 정리한 것이다. 「한겨레」에 매주 한 차례씩 6개월 동안 연재한 글을 대폭 수정했고, 전체 분량의 30%는 지난겨울에 새로 보완했다.
*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나?
적어도 기본적인 품격을 갖춘 시는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허접스러운 시를 버릴 줄 아는 안목을 키울 수 있다면, 시와 시 아닌 것을 구별할 줄만 안다면 그것도 다행이 아닐까?
*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근대적 한국문학은 서구 문학이론과 미학적 관점을 적극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