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의 역사

에드워드 쇼터 · History
6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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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서문 1 정신의학의 탄생 2 수용소의 시대 3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탄생 4 신경성 질환의 시대 5 정신분석, 그리고 정신의학의 다?ㄹ 6 대안을 찾아 7 생물정신의학의 부활 8 프로이트에서 프로작으로 옮긴이의 글 주석 찾아보기

Description

정신이상은 과연 실재하는 질병인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신화’인가! 비인간적인 수용소, 어린 시절의 성적 트라우마, 그리고 두 개 절제술과 프로작 남용까지 전문 의료분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정신의학계의 투쟁, 그 도전의 역사에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을 파헤친다! 근대 이전 광인은 각 가정이나 마을에서 알아서 “처리”되었고, 17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정신의학은 ‘대감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그 첫발을 내딛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의사들은 저급한 뇌수술을 시행하였고, 환자들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두개골을 절단당하고, 냉온수 마찰과 전기충격 같은 근거없는 치료법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로부터 50년 후 현대의 정신과 의사집단은 개인의 성격적 특이성과 실존적 고통을 모조리 질병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으며, 거대 제약회사는 프로작 같은 정신약물을 가정 상비약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과연 인간 정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한 위대한 도전의 역사인가,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추악한 투쟁의 역사인가? 정신의학이 걸어온 300년 역사를 파헤친다. 18세기 광인의 수용소에서 20세기 프로작의 시대까지, 정신의학의 사회사 18세기의 광인 수용소부터 20세기 어느 개업의의 진료소까지, 정신의학의 역사를 사회사적 시각으로 살핀 캐나다의 세계적인 의학사학자 에드워드 쇼터의 『정신의학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97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정신의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 매김해 왔다. 또한 단순히 정신의학 전공자를 위한 역사 교재가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인간 정신의 실존적 고통에 대한 의료화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사회적 의미를 지닌 책으로도 평가 받아 왔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일반적인 의학사와는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질병의 극복과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 같은 영웅담으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면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은 광인들, 끔찍하고 치욕적인 수용소, 냉온수 마찰과 전기충격, 각종 쇼크요법 등 저급하고 비인간적인 치료법까지, 인간에 대한 의학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정신의학이다. 18세기 말 치료적 수용소의 풍경에서 시작된 이 책의 이야기는 20세기 말 정신과 개업의의 조용한 진료실에서 끝난다. 푸코의 ‘대감금’ 주장에 대한 반박, 초기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 프로이트에 대한 혹평 등 이 책에는 우리가 전혀 몰랐거나 일면만 알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반전으로 가득하다. 또한 최근 거대 제약회사들이 벌이는 정신이상의 의료화 음모에까지 파고들면서 정신의학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푸코의 “대감금”은 ‘넌센스’이다 치료적 수용소의 등장과 정신의학의 탄생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의학이 국가권력에 의한 인민의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병리를 관료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당시 유럽 전역에 “대감금”이 있었다고 한다. 푸코의 이런 주장은 20세기 지식인들 사회에서 대유행을 하게 되었고, 정신의학에 대한 편견과 오명을 강화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푸코가 말하는 “대감금”은 어처구니없는 난센스에 불과하다. 푸코는 “정신의학”이 국가권력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 하는데, 국가 통제가 강력했던 독일에서도 19세기까지는 ‘정신과’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또한 저자는 수많은 역사적 기록과 통계자료를 들어 당시의 광인 수용 시설과 수용자의 수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장 컸던 시설인 비세트르도 사실상은 종합병원 시설이었고, 여기에 수용된 광인은 간질환자와 정신지체를 포함하여 245명뿐이었다. 푸코가 ‘대감금’의 사례로 꼽은 잉글랜드에도 1826년의 조사를 보면 공립이든 사립이든 수용소에 있던 사람은 소수였고, 베들렘과 세이트 루크 병원에 있는 환자를 다 합쳐도 500명이었다. 감옥에 있던 자 중 광인으로 분류된 사람도 53명뿐이었다. 따라서 푸코의 말처럼 정신병자가 3000만 명이 넘었다는 ‘대감금’의 근거는 희박하다. “봐라, 봐라. 저기 미친놈이 간다” 정신과가 없던 세상, 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튼튼한 남자나 여자가 미쳤다고 간주되면, 마을에서 이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라고는 오두막 바닥에 구멍을 파서 밀어넣은 다음 기어나오지 못하게 덮는 것이다. 구멍의 깊이는 1.5미터 정도 …… 대개는 그 안에서 죽게 된다.” _ 1817년 아일랜드 지역구 의원의 기록 정신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정신병은 부분적으로는 생물학적이고 또 유전적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이 정신병자를 돌봐 왔고 관리 지침서 등이 있긴 했지만, 18세기 말 이전까지 전문 의학분야로서의 정신과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18세기 이전까지 광인을 돌보는 주체는 가정이나 마을이었다. 그러나 ‘돌봄’의 방식은 매우 드물었다. 전통 관습과 사회적 역할이 중요했던 그 시절, 마음과 기분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다뤄졌다. 1870년 스위스 프라이부르크 주에서 정신병자 실태를 조사했다. 확인된 164명의 정신병자 중 5분의 1은 냉방이나 광에 묶여 있어서 “비좁고 어둡고 습한 곳에서 오물 냄새에 절어” 있거나 “자기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짚더미에” 있었다. 집안이나 마을에 광인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그래서 행여 수용소가 있다 하더라도 가정 단위로 범죄에 가까운(강제격리)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회개혁가인 도로시아 딕스가 메사추세츠 주의 시골을 다니며 발견한 것은 “새장에 갇힌 여자” “사슬에 묶인 정신박약 한 명” “17년간 축사에 갇혀 있던 사람” “쇠창살 우리 안에 네 명의 여자” 등이었다. 이런 일화들은 극단적이고 기괴한 상황이 아니라 당시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정신의학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환자들은 관대한 처우를 받지 못했으며, 멋대로 돌아다니게 방치되지도 않았다. 동정심 없는 야만스러운 처우와 추방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모든 것이었다. “치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사회로 복귀할 가능성은 있다.” 계몽주의적 의사들의 등장과 치료적 수용소의 탄생 1793년, 프랑스의 자코뱅 정부는 38세의 젊은 의사 필립 피넬에게 비세트르 호스피스의 운영을 맡긴다. 계몽주의와 사회진보철학에 고취된 피넬은 비세트르에서 정신질환의 치유 가능성과 인도주의적 돌봄이라는 개혁주의적 이상을 발휘한다. 그는 이곳에서 광인을 사슬로부터 풀어내 명성을 얻게 되고, 그 덕에 1795년 살페트리에르의 원장이 되면서 그곳에서도 광인의 사슬을 풀어 주었다. 필립 피넬의 주장은 명료했다. 수용소 감금은 치료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수용소의 본질은 심리적 치료를 하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환자들과 친밀했고, 따듯한 목욕으로 환자를 안정시켰으며, 환자들은 부지런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프랑스에 필립 피넬이 있었다면, 독일에는 할레 대학의 요한 레일이 있었다. 수용소의 끔찍한 실상에 경악한 계몽주의자 레일은 인류애와 시민의식이 실종한 이 불행한 사태를 해결할 이는 의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용소가 가족은 제공할 수 없는 시설과 보조적 치료를 담당하는 곳이어야 한다며 인간적 대우를 강조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18세기 후반으로 넘어서면서 정신병자 수용소는 치료적 수용소로 조금씩 탈바꿈하고 있었다. 당시 수용소가 치료적 효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동체 정신을 갖춘 환경, 또 하나는 의사-환자 관계였다. 이중 의사-환자 관계를 강화한 방식은 “도덕치료”라고 불렸고, 이는 수용소가 이전의 “광인의 집”과 구별되는 새로운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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