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책에는 올해로 여든을 맞은 이소선의 지나온 세월에 대한 기억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그대로 담겨 있다. 6백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며 그 이야기를 들은 오도엽이 글로 옮겼다. 투박하고 때로는 거칠기도 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밉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한 이소선이 우리에게 주는 응원이자 선물이다.
1. 선물
그녀는 1929년 태어나 1947년 열아홉 살에 결혼을 해 아이 셋을 낳았다. 마흔 넘어 삶의 기둥이었던 큰아들을 잃었다. 1970년 11월 13일, 그날 이후 우리에게 전태일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사람.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노라며 38년을 사는 동안 180번이나 나랏법을 어기고 세 차례나 옥살이를 한 사람.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에게 ‘어머니’로 불리는 사람. 이제 여든이 된 그 ‘어머니’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그 이야기를 작은 책에 담았다. 사회의 원로인 ‘어른’이 다음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훈계나 질책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이 책은 그 이름에 붙어다니던 거창한 수식어를 걷어 낸 ‘이소선’이 질풍 같은 시대를 버티며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주는 따뜻한 응원이요, 위로의 선물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낼모레가 여든인데…… 생각하니까 내가 못한 것도 있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 사람도 많은 거야. 못난 사람이 이제껏 살았으니 얼마나 옆에 고마운 사람이 많겠냐. 그래서 지금까지 나를 아껴 준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을 쓸라면 쓰라고 했지. 소설처럼 지어내지 말고.
아무튼 모든 사람들 고맙습니다. 내 말은 이것뿐입니다.”
2. 기억
이 책은 민주화 운동의 ‘맹장’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소선의 특별한 인생을 칭송하는 평전도, 자서전도 아니다. 두 사람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이소선)은 여든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 사람(오도엽)은 6백일의 기억을 적는다. 그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앓아눕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한숨으로 하염없이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는 희망을 꿈꾸기도 했다. 두 사람의 기억이 씨줄과 날줄로 교차되면서 투박하지만 진솔하고, 뜨겁지만 넘치지 않는 한 인생이 그려진다. 어찌 이런 삶을 견딜 수 있었을까 싶다가도 문득 생각해 보면 언젠가 내가 겪었던 일 같기도 하다. 우리네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저항’의 표상인듯 싶다가도 어느새 내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며 옛날이야기를 주절이 풀어내는 할머니가 다가온다. 자신은 무얼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지만, 수많은 죽음과 이별, 상처와 싸움 속에서도 멈출 수 없는, 망설임 없는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깨달음을 준다.
“효도하던 자식이 불효한다고 내칠 수 있냐. 만나서 야단치고 달래고 회초리를 들기도 하고 어르기도 해야지. 또 잘난 자식 있으면 못난 자식도 있는 법 아니냐.”
자식 앞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여느 어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이소선을 아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그리 말해도 이소선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소선에게는 장기표도 김문수도 모두 친자식과 같다. 한 번 인연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보통 어머니’가 되고 만다.
일이 년이나 살겠어, 이게 마지막이지. 이소선의 이 말에 나는 창신동에 주저앉았다. 이소선 몰래 녹음기를 켜놓고 밤부터 새벽까지 이야기를 했다. 아니, 이소선은 이야기를 하고 나는 졸았다. 졸고 있으면, 너 지금 자냐? 하며 깨우면 눈을 떴다가 아뇨, 하며 다시 졸았다.
3. 인간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은 오래전에 이소선에 관해 쓴 글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나는 전신주에서 내려오자 걷어낸 플래카드를 형사의 모가지에 감아서 나뒹굴었다. 그리곤 플래카드로 있는 힘을 다해서 형사의 목을 졸랐다.”
얼핏 보아 ‘우아하다’거나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소선의 그런 ‘우아하지도 않고 인간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삶을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무슨 ‘인간적인 빚’이 있는 것처럼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정혜신의 인간탐구:인간관계의 달인 김종호, 인간적 삶의 등불 이소선” 신동아 2001년 8월호)
왜일까? 정혜신의 말처럼, 사람들은 왜 이소선에게 ‘인간적인 빚’ 때문에 불편함을 갖는 걸까? 이소선이 겪은 고통과 상처, 거기서 보여준 치열함과 한치의 타협도 없는 저항, 두려움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인간적인 갈등’에서 비껴난 ‘상징’적 존재로 저만치 밀어낸다. 우리는 종종 ‘인간적’이라는 말을 ‘인간의 나약함, 비겁함에 대한 자기변명’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현실의 모순을 깨치려 하고, 어떤 이들은 1천일을 공장 옥상에서 농성을 한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한국 사회의 현실 앞에서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소선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한다.
“나야 태일이 죽은 뒤에 미쳐서 지금까지 이러고 살지만 남들이 어떻게 나처럼 평생 미쳐서 살겠냐. 하루든 몇 달이든 열심히 싸우고 살아온 게 어디냐. 내겐 정말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지. 난 누구도 원망하고 살지 않아야.”.
과거에 대한 부채감이 오늘의 나를 합리화하는 도구가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 그 현장에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경의는 향수 어린 부채감에서 놓여날 때 비로소 진정성을 갖게 될 것이다. 오늘 내가 부딪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소선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외출했다가도 집에 있는 젊은 친구의 끼니를 걱정하고, 그리운 사람들 안부가 궁금해 매일 밤 전화번호가 가득 적힌 수첩을 뒤적이는 팔순 노인의 손가락 마디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 ‘인간다운 진정’ 때문이다.
매일 부딪히는 현실의 모순을 탓하며, 일상의 남루함을 애써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