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짧은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성이 남성에게 말하는 가장 단도직입적인 페미니즘
지식보다는 상식에 가까운
가장 쉽고도 직접적인 책, 맨박스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당당히 서점의 한 분야를 차지하기 전인 2016년 8월. 여성도 아닌 남성, 그것도 매우 건장한 흑인 남성이 쓴 생소한 제목의 책이 등장했다. 바로 토니 포터의 《맨박스Man Box》다. 이후 쏟아져 나온 수많은 페미니즘 도서의 선전 속에서도 굳건히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켜온 이 책은 ‘맨박스’라는 낯선 개념을 우리 사회 가장 뜨거운 논쟁의 한복판으로 이끈 포석이 되었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공감은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는다. 배우 김윤석, 가수 RM(방탄소년단), 배우 하정우 등 다양한 세대의 ‘셀럽’들이 자발적으로 이 책을 찾아 읽는다. 출간 전 300건도 되지 않았던 ‘맨박스’ 검색 결과는 현재 2,500만 건에 이른다. 국내 유력 일간지들을 비롯해 ‘맨박스’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매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출간 후 2년 9개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 책을 통해 촉발된 다양한 논쟁은 우리 사회에서 고착화된 기존의 성역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 《맨박스》는 특별한 ‘지식’보다는, 반드시 알아야 할 기본적인 ‘상식’을 다루는 책으로 소비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가부장제라는 걸림돌이 더해진 국내의 현실을 감안하면 변화의 폭이 매우 크다.
변화에 발맞춰 이 책의 개정판에도 많은 수정이 이뤄졌다. 성평등에 적합한 어휘를 세심히 골라 그간 달라진 인식의 반영을 꾀했으며, 기존의 정보 요소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새로운 판형과 간결한 디자인을 통해 가볍지만 힘 있는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맨박스’는 이제 페미니즘을 논할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유명사다. 크고 작은 논쟁을 꽃피우며 사회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 책은 혐오 감정으로 편을 가르고 정신없이 싸우느라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이성과 싸워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지난한 반목을 깰 해답은 어쩌면 여기 있을지 모른다.
_‘맨박스’가 남긴 것들
>>남성이 스스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껴 구매했을 가능성은 훨씬 낮다. 그리고 자신의 남자 친구나 아들, 아버지, 오빠, 직장 동료에게 이 책을 선물한 여성이라면 이렇게 책 소개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 한번 보세요. 그냥 휙 읽을 수 있는 짧은 책이거든요. 두껍지도 않죠? 재미있는 얘기도 많아요.” 이렇게 가볍게 소개하지 않는 이상 남성들 대부분이 이 책을 열어보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26쪽
한국어판 《맨박스》의 출간 이후 가장 많은 독자가 언급한 인용구를 꼽으라면 바로 위 문구일 것이다. 정확히 남성을 핵심 독자로 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초기 판매는 여성 독자를 통해 일어났다. 여성들이 먼저 책을 읽고 주변 남성들에게 권하면서 확산이 시작된 것이다. 평범하고 선한 남성일수록 사회가 원하는 남성성에 가까워지려 애쓰지만, 자발적으로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부적절하게 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고백하는 남성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오히려 이런 말을 흔히 듣는다. “그놈들과 나를 엮지 마. 걔들은 내 손에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자신과 몇몇 나쁜 남성을 구분 지어 생각하다 보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마치 백인이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에요. 다른 백인 중에는 흑인을 차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고방식에 안주하면 정작 사회 구조적 차별에 대한 비판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마련하기 어렵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와 자신은 별개라는 생각으로 자아 성찰을 거부할 때 사회 구조적 차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외면하게 된다. -본문 176~177쪽
비교적 열린 성의식을 가진 미국에서도 남성의 성역할은 여성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강요되어 왔다. 미국의 평범한 남성으로 살며 자신이 겪었던 ‘맨박스’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저자의 TED 강연 “A Call To Men(한국어 번역 제목: 남자들에게 고함)”이 현지에서 270만 뷰 이상을 기록하며 큰 지지를 받은 것만 보아도 그렇다. (국내에서는 55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남자다움’을 의심한다. 그는 모든 남성이 남들보다 우월하지 않아도 괜찮고, 느낌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그냥 친구로만 지내는 이성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저자가 묘사한 ‘슬픔을 참아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더욱 빈번할 것이다.
>>나의 남동생 헨리의 장례식은 뉴욕 시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슬픈 순간이었다. 헨리를 땅에 묻고 우리 가족은 운구차에 올랐다. 도시로 되돌아가는 긴 여정을 앞두고 운전사는 우리 가족이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도록 잠시 멈춰 섰다. 어머니와 누이들이 차에서 내리고 나와 아버지만 리무진에 남자 아버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당시 나는 스물한 살이었는데 그때까지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걸 싫어하셨지만 그렇다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아내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차라리 어린 아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게 여자들 앞에서 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아버지는 고작 10분 전에 어린 아들을 땅에 묻었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아버지는 곧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에 대해 사과하셨다. 그리고 울음을 참아낸 내가 자랑스럽다고 칭찬하셨다. -본문 22~23쪽
“남자는 울면 안 돼!” 세상에 나온 지 4~5년밖에 안 된 어린 남자아이에게도 익숙할 이 한마디에는 많은 사회적 통념이 담겨 있다. 남자는 강해야 하고, 약한 것들을 지켜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은 오직 분노뿐이다. 하지만 그 강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다. ‘보호’를 받는 ‘나약한 존재’로서의 여성이 그로 인해 행복해졌는지 또한 의문이다. 남자도 여자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혹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강요받아 온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_평범한 남성의 분노가 모든 여성의 삶을 바꾼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과 공존하기 위해 상식처럼 배우고 쓰는 갖가지 고육지책에 대해 전혀 모른 채로 살아간다. 밤늦은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이용할 때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 택시를 탈 때 차량 번호와 색깔을 남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운전을 배울 때도 다르다. 지하 주차장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낮의 야외에서조차 봉고차나 큰 차 옆에 주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배운다. 큰 차가 시야를 가리는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혼자 운동이나 등산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에 혼자 가서도 안 된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도 ‘몰카’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은지 나사 구멍을 빤히 들여다본다. 이 밖에도 수백수천 가지 ‘조심해야 할’ 리스트가 있다. 남자들이 모르는 현실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어머니가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열쇠도 못 챙기면서 네 안전을 챙길 수나 있겠니?” 분명 누이들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조언이겠지만 이 말 속에는 ‘네 몸은 네가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