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의도, 민주주의도 무너진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고 행동할 것인지 2016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푸코의 말을 통해 우리 자신과 대한민국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이 책은 1978년 5월 27일에 소르본대학교에서 프랑스 철학회 주최로 열린 푸코의 강연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1983년 4월 12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있었던 푸코의 강연 〈자기 수양〉, 그리고 버클리캠퍼스에서의 강연과 함께 기획된 세 차례의 토론을 싣고 있다. 이 책에는 이 텍스트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유용한 각주들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푸코의 이 두 강연은 그의 사상의 변화와 연속성을 동시에 명확히 해명하는 중요한 텍스트이며, 특히 푸코 후기 사유의 중심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의 문제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제공한다. 비판의 가장 일차적인 정의는,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라고 푸코는 말한다. 비판은 권위, 전통, 권력의 남용과 싸우고, 그 보충물인 관성, 맹목, 환상, 비굴함과 싸우는 것이다. 비판은 인간들의 통치를 문제 삼는 태도이며, 개인의 결정에 의거하는 투쟁의 형태 내에서 총체적 구원을 목표로 주어진다. 우리는 적어도 권위가 그것을 진실이라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고 여길 때에만 수용해야 한다.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비순종의 기술이다. 비판은 한마디로 진실을 위한 정치라 부를 수 있다. ■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 푸코는 우선 자신이 말하는 ‘비판적 태도’의 존재 방식을 칸트가 시도한 ‘비판’의 기획으로부터 끌어낸다. 16세기 서구 유럽의 여러 사회들에서 상당히 특징적으로 보이는 통치의 일반화는, ‘어떻게 통치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 이것을 푸코는 ‘비판적 태도’라 부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비판적 태도’가 결코 “통치받는 것에 대한 절대적 저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판적 태도’는 권력의 한복판에서, 때로는 자신과 자신에 대한 통치의 과잉을 감시하고 이것을 교정하려는 자세다.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비순종의 기술이다. 비판은 한마디로 진실을 둘러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 속에서 탈예속화를 본질 기능으로 갖는다. 즉, 자기 의지를 통해, 자기에 대한 통치에 대항하기 위한 기술로 정의된다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 비판과 계몽의 관계 푸코의 비판에 대한 정의는 칸트가 한 비판에 대한 정의를 토대로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차이가 난다. 칸트적 비판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잉 권력에 의한 통치의 일반화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칸트가 말하는 비판이 반드시 ‘이런 식으로 통치 당하지 않기 위한 기술’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푸코는 칸트 안에서 쌍을 이루고 있는 비판과 계몽 개념을 분리하고, 후자인 계몽의 기획에 입각해 자신의 말하는 비판을 정의하고 그 전략을 설명한다. 푸코는 칸트가 자신의 논고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인류가 거기에 머물러 있고 또 머물도록 강제 당하는 어떤 미성숙 상태와 연관시켜 계몽을 정의”했다고 지적한다. 권위의 힘이나 지도를 통해 인간의 지성을 행사하는 힘을 약화시켜 미성숙의 상태에 놔두려고 하는 권위의 과잉, 이것에 대항하는 용기와 결의를 촉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다. 칸트는 종교, 법, 지식과 같은 세 영역이 인류를 미성숙의 상태에 빠트린다고 주장하고 여기로부터 탈출해 어떻게 성숙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숙고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기술하는 이 ‘계몽’이 바로 푸코가 주장하는 비판이고 그것은 통치의 일반화 내에서 어떤 종류의 저항으로 서구 세계가 고안한 ‘비판적 태도’를 만인에게 호소하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 지식과 권력의 관계 18세기는 근대 과학과 국가의 통치가 전면에 등장함과 더불어 칸트가 비판과 계몽의 문제를 제기한 시대였다. 이 시대에 현대의 토대가 되는 통치 방식, 요컨대 권력, 진실, 주체가 세밀하게 관계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과학 기술’이라는 말과의 연관이 확실히 표현하듯이 지식, 진실의 체계는 그것이 통치 기술과 결부됨으로써 강제를 정당화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어떤 지식이 진실인가 허위인가,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 현실인가 환상인가, 정당한가 남용되고 있는가 등을 추적하는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는 확실히 중요하다. 이러한 방법론에서는 ‘지식과 권력’이라는 두 개념이 핵심이 된다. 이 두 개념은 어떤 행위나 그 효과의 정당성을 특정 상황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용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두 개념은 어디까지나 어떤 지식, 어떤 지배의 정당화가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적 절차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예를 들어 ‘정보’처럼 인간에게 중립적이거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권력’과 결합해 비로소 그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정신병의 체계, 형벌의 체계, 범죄 행위의 체계, 성현상의 체계 등 어떤 체계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 자기 수양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주체의 해석학》의 요약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 수양>은 바깥에서 오는 힘들이 우리의 사유 방식과 실존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어떤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 내느냐에 관한 푸코의 오랜 논의를 싣는다. 우리는 그 논의의 단초를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 ? 제1권 지식의 의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감시와 처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거기서 푸코는 우리를 둘러싼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에 의해 우리의 행동 방식, 사유 방식 그리고 우리의 주체성 그 자체까지가 어떤 식으로 결정되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런데 권력을 실체로 보지 않고 ‘권력 관계’로 묘사하는 푸코에게 있어 힘은 늘 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권력 관계는 언제나 역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푸코는 자신 있게 “권력 관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저항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푸코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 즉 진실이나 타자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권력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저항의 지점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 자기 돌봄의 재발견 푸코는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의 기술들에 주목한다. 자기와 관계 맺는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기에 대해 궁금해 하며 알고자 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혐오할 수도 있으며 자기의 모습을 자기가 원하는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만들고 싶을 수도 있다. 푸코는 자기와 관계 맺는 이 다양한 기술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꽃피었던, 자기와 관계 맺는 하나의 중요한 태도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어떤 예술 작품의 질료로 여기며 가꾸어 나가는 태도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서구 역사 속에서 상당 부분 지워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를 인식의 대상으로만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