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발견, 우크라이나의 복권”
1991년 독립까지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국가
유럽의 대국이 될 잠재력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읽어내다!
·동서 유럽 힘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우크라이나
·동슬라브 종가였던 이곳은 어떻게 나라를 잃고 되찾았나
·유럽의 ‘빵 바구니’였다가 극심한 기근을 겪기까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현장감 있게 담아낸 우크라이나 통사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전前 우크라이나 대사이자 니혼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를 지낸 저자가 쓴 ‘우크라이나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대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복잡하고 긴 역사를 풀어 쓰고, 근대 들어 러시아와 유럽의 틈바구니 속에서 강국들의 침략을 받은 대고난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타민족의 지배와 그로부터의 독립을 반복하면서 지금과 같은 최대 인구의 국가로 번창할 수 있었는지 그 핵심적인 계기들을 밝히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첫 출발은 루스 카간국으로, 러시아(루스)라는 이름도 원래 여기서 가져다 쓴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2세기까지 모든 견직물을 ‘루스제製’라고 불렀다. 그만큼 이 나라는 농업과 상업, 무역의 중심지였다.
저자는 중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가 큰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인구는 5000만 명으로 프랑스에 필적한다. 철광석은 유럽 최대 규모의 산지를 자랑한다. 농업은 세계의 흑토지대의 30퍼센트를 차지해 언젠가 ‘유럽의 곡창’의 지위를 회복할 것이다.
두 번째는 지정학적인 중요성이다. 유럽에서 우크라이나만큼 여러 민족이 거쳐간 곳은 없다. 우크라이나는 서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였다. 그런 까닭에 우크라이나는 세계 지도를 다시 쓴 대북방전쟁,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두 차례 세계대전의 전장이 되었고 많은 세력이 이 나라를 노렸다. 즉 우크라이나의 향방에 따라 동서 힘의 균형은 달라졌다. 이것은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 하고,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나라가 없는 나라의 역사
대국으로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수가 12세기 말경 이미 700만~8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인구가 800만 명이었다).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일 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수준도 높아 구소련의 첨단 기술 중 SS-19, SS-21 등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우크라이나에서 제작됐다. 또 고골, 호로비츠, 니진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문화예술계의 대가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단 하나의 주제를 꼽자면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수브텔니는 우크라이나사의 핵심이 국가의 틀 없이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유럽의 세력 균형 속에서 우크라이나 ‘땅’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사를 풀어간다.
이 책은 두텁지 않지만 고대에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독립까지 일목요연하게, 중요한 국제관계와 내분의 양상을 모두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체류했던 외교관으로서 독립국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면서 러시아와 미국·유럽 간의 관계를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찰해 큰 도움이 된다. 국내에 이렇게 종합적인 우크라이나 통사는 출간된 적이 없어 최근 러시아와의 극도의 긴장관계를 보이고 있는 진정한 이유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유럽의 힘겨루기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15세기만 해도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 있는 비슬라브 부족체의 연합체일 뿐이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쪽에서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근간이 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는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역사가 오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1340년대에 볼린과 할리치나는 각각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병합됨으로써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는 소멸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 민족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분화됐고 언어도 제각기 사용했다. 다만 이 시기에 ‘가장 우크라이나답다’고 할 수 있는 코사크(준군사적 자치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땅은 여러 나라가 노리는 먹잇감이 되었다. 먼저 리투아니아가 한때 볼린, 체르니히우, 키예프 지방, 드네프르강 동안까지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특이했던 것은 언어와 문화 모두 리투아니아인들이 우크라이나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다음으로 촉수를 뻗은 것은 폴란드였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자기네 문화를 강제로 심으려 한 점에서 완전히 달랐고, 이는 훗날까지 우크라이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 지역에서 정치적 힘은 종교와 관계가 깊었다. 키예프 루스 시대에 루스 땅에는 정교가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교는 두 방향에서 문제가 생겼다. 첫째, 우크라이나 땅이 정치적으로 약해지자 정교의 중심이 키예프를 벗어났고, 모스크바 공국이 융성함에 따라 ‘키예프 부주교좌’를 그곳으로 옮겨갔다. 둘째, 폴란드의 가톨릭이 강성해지자 루스 귀족들이 정교를 떠나 폴란드에 동화돼간 점이다. 그러자 정교와 루스의 언어는 어느덧 하층계급의 것으로 전락했다.
늘 득세하는 것은 러시아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1480년 킵차크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제3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모스크바는 루스 땅을 둘러싸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맞붙으면서 서서히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1654년 페레야슬라프 보호 협정으로, 이 협정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없다. 러시아사에서 이것은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반면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이 협정이 당시 지도자 흐멜니츠키가 동맹들과 맺은 보호 약속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의 고압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껴 스웨덴 등과 동맹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해버렸다.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검증해볼 때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해석이 맞는다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자치를 지키고자 모스크바의 보호를 요청한 것일 뿐이었다. 다만 사후 맥락에서 이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병합되도록 한, 파멸의 첫걸음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모스크바는 이 협정 덕에 제국의 길을 밟아간다.
세계대전이 유린한 나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가 탐을 냈던 땅이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가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일차대전까지 120년간 우크라이나 영토는 80퍼센트가 러시아 제국, 20퍼센트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일차대전이 터지자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만큼 심하게 유린당한 땅도 없었다. 전쟁 후에도 사방에서 침투하는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동쪽은 볼셰비키 적군, 서쪽은 폴란드군, 동남쪽 돈강 방면은 반혁명의 백군, 서남쪽 드네스트르강 방면은 루마니아군, 남부 오데사 방면은 프랑스군이 간섭하고 있었다. 이처럼 1919년과 1920년의 우크라이나는 근대 유럽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22년 소연방이 성립되면서 우크라이나는 70여 년간 연방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런 와중에 1929년 빈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이 결성돼 무력 투쟁을 벌인다. 폴란드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한 이 시도는 그러나 서광도 못 본 채 이차대전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차대전에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의 6분의 1인 530만 명을 잃었다. 또 이 시기 소련 전체의 물질적 손해 중 4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에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