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파리8대학 산하 철학의 현대적 논리 연구소에서 데리다 연구로 박사 논문을 쓴 김민호 선생이 역사에 대한 데리다의 사유를 주제로 한 강연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데리다는 회의적 허무주의자, 상대주의자 등으로 오해되어 왔지만, 이 책의 저자는 데리다야말로 역사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철학의 내부에 전격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라고 평가한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도 역사를 다르게 사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책 『데리다와 역사: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필로버스총서 2)은 20세기 가장 빛나는 철학자 중 한 명이자 가장 난해한 철학자로 유명한 자크 데리다 사상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서가 될 것이다. *필로버스 총서는 에디스코가 필로버스(www.philoverse.com)와 함께 인문사회 분야 신진 연구자들의 출간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이다. 20세기 가장 빛나는 철학자이자 가장 난해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 데리다 철학은 역사를 다르게 사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체, 역사를 다르게 사유하기 자크 데리다(1930~2004)는 20세기 가장 빛나는 철학자이자 가장 난해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오해되어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푸코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데리다 철학은 실제의 삶, 인물, 역사를 간과한다고 평가했다. 데리다의 사유 전체가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이야기라고, 데리다는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데리다를 이런 시선으로 보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데리다와 역사’의 조합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민호 선생은 데리다의 ‘해체’ 개념은 근본적으로 또 다른 역사성을 사고하는 문제였으며 “데리다의 이념적이고 철학적인 여정은 역사성의 곁에서 개시”되었다고 말한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데리다 사상에서 역사 개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책 『데리다와 역사: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은 데리다의 사상에서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이 역사, 역사성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데리다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철학이 향하는 지점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데리다는 ‘역사 철학’이 존재하는 곳에 ‘역사’는 없다고 단언한다. “데리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신학-시원-목적론”의 시간 속에서 역사는, 즉 생은 고유하고 독특한 펼쳐짐을 망실하고 앞선 현재들의 한낱 필연적 산물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생, 목적지가 정해진 생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9쪽) 데리다는 역사 철학처럼 역사에 필연적인 목적이 있다는 “존재-신학-시원-목적론”의 역사성을 비판한다. 모든 것이 필연적인 곳에서는 의미가 생겨날 수 없다. 데리다는 역사 철학이 생을 무의미한 상태로 만든다고 보았다. 역사가 필연적인 목적지를 향해 간다면 “생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생은 그저 정해진 목적지로 가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이런 이념적 필연성은 물질적 필연성만큼 생의 고유한 풍요로움을 거세한다. 저자에 따르면 데리다는 이런 무의미의 압도적 폭력에 맞서서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이다. 의미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과 부재를 경유해야만, 또 우연성과 우발성을 승인해야만 도출될 수 있다. 데리다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교차하면서 사건이 만들어지고 역사가 생산된다고 보았다. 저자는 데리다에게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우발적인 기회를 필연적인 리듬 속에서 소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역사는 무질서한 사태(우연)에 질서(필연)를 만드는 일, 기호를 통해 의미를 재단하고 포획하고 절취하는 액자화의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액자화의 운동이고, 액자화에 따라 동일한 사태도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데리다는 역사는 단선적 계열로 쉽게 결정되고 정리될 수 없기 때문에 역사다워진다고 보았다. 기호는 의미를 적재하고 있는 물질이지만, 기호와 의미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 기호가 그 자체로 우발성을 체현하는 최소 형태인 것이다. 흔히 우리는 언어가 무의미를 진리로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언어는 의미를 유실할 위험, 무의미에 내맡겨질 위험에 처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언어의 역사가 무의미와 진리라는 두 죽음 사이에 있다고, 물질적인 필연성과 이념적인 필연성 양자 모두와 거리를 두고 특정한 우발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소화하려는 노력 속에 역사와 생과 우리 사유의 운동이 있다고 말한다. 에크리튀르의 원폭력 역사쓰기를 통해 비로소 생성되는 역사 기본적으로 선사와 역사를 가르는 기준점인 에크리튀르는 기록하고 기호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호signe란 무엇이죠? 기의가 적재된 기표, 의미가 적재된 기호, 이념이 적재된 물질입니다. 그렇다면 기호작용signification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기호라는 개념의 두 축, 즉 이념과 물질 중 어느 한쪽으로의 환원을 거부하고 그 사이에서 머무는 작용이 됩니다. 이 사이가 곧 의미signification의 장이고 역사의 장이자 삶의 장이라는 이야기를 저번에 말씀드렸죠.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56쪽) 기록, 문자, 글쓰기를 뜻하는 에크리튀르는 데리다에게 역사와 철학의 가능 조건이다. 기록은 기호화이다. 기호화는 인용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의미의 단위를 재단하고 절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기호화가 반복 가능한 단위의 생산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쓰는 행위가 근원적인 폭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차이와 반복의 체계 속에 대상을 집어넣는 “원에크리튀르의 제스처”는 고유성에 대한 위협이자 폭력이며, 이는 다른 모든 종류의 폭력에 앞서는 폭력이다. 고유하려면 모든 차이와 무관해야 하고 반복 불가능해야 하는데, 기호의 의미는 차이의 망 속에서 의미를 가지고, 반복 가능한 것으로서 인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고유성을 고유한 채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호화되고 기록되는 한에서만 역사가 되고, 그래야만 우리가 역사를 역사로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쓰기는 근원적으로 폭력적이지만, 우린 그 폭력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선택, 선별, 여과를 포함한 모든 규정은 폭력이지만, 우리는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선별하고 규정함으로써만 의미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데리다가 무의미와 허무주의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역사가 되는 특별한 사건이 따로 있는 것인가. 데리다가 보기에 처음부터 원본적인 사건으로 주어지는 사태는 없다. 의미 있는 사건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데리다는 기록되고 전승되는 반복 가능성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무언가가 기록된다는 것은 기록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배제하고, 죽이고, 누락하면서 역사로서 액자화 되어야만 의미가 만들어지고 되새길 만한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사건인지 아닌지는 사건의 시점에서 즉시 결정될 수 없다. 이런 결정 불가능성이 우리가 무언가를 사건으로 생산할 수 있게끔 허락한다. 또 기록의 가능성은 늘 그 기록을 하는 사람의 부재 가능성, 사멸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호와 서명은 서명자가 부재해도 여전히 기호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이 부재하더라도 여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와 생은 이념적인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