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이제 큰일이 일어날 참이다.”_문학평론가 김형중 “한국 소설에 새로운 겹이 생길 것 같다.”_소설가 권여선 내면의 불길한 욕망과 분노를 발견한 자, 90년대 새 문을 열었던 그가, 오늘 또 다른 문을 연다 다시 돌아온 그는 새로운 백민석으로 시작할 것이다!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백민석이 돌아왔다. 1995년 『문학과사회』에 소설을 발표하며 등장한 그는 “현란한 젊은 문체, 발랄한 감수성은 우리 전래의 문학적 풍속을 일거에 일그러뜨리고 새로이 새롭게 돋아난다”(문학평론가 김병익), “낯설기조차 한 그의 젊음은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날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해낸다”(문학평론가 김종욱) 등의 평을 받으며 1990년대 문학에서 뉴웨이브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아파트 세대와 텔레비전 키드로 명명되며 도시에서 자라난 이들의 우울한 감각을 보여주었고, 분노와 증오로 요동치는 언어와 기괴한 상상력을 분출해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9년여 동안 두 편의 소설집과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을 계속하다가 돌연 2003년에 절필을 선언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 ‘자발적 실종자’는 시골마을에서 어부가 되었다는 식의 소문만 무성한 채 근황을 알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체되지 않는 이름으로 한국 문학에 남았고, 그가 열어놓은 새 지평을 토대로 이후의 한국 소설은 무성하게 뻗어나가 다양한 형태로 풍요로워졌다. 그리고 2013년 겨울, 다시 돌아온 백민석이 소설집 『혀끝의 남자』(문학과지성사, 2013)를 출간하였다. 두 편의 신작과 일곱 편의 기발표작을 새로 고쳐 총 아홉 편의 소설을 묶어냈다. 지난 10년간 자신을 “살게 하기 위해” 문학을 떠났던 백민석은 또 다른 생의 현장에서 몸소 일상을 견뎠고, “예전에 뾰족뾰족했던 부분은 모두 구부러졌다”고 표현하듯 이전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번 소설집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변화’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백민석은 이 연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무의미한 삶에 내던져진 인간들이 비참을 견뎌내는 방식에 대해 치열하게 다가간다. 독자들은 그의 고민을 되새기며 과연 그의 지난 10년이 소설과 우리들의 바깥에 자리했는지 의심하며 이번 소설집을 더욱 바짝 끌어당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음새와 맺음새-덜어낸 것과 가져온 것 소설집 『혀끝의 남자』는 이전 백민석 소설의 세계들과 몇 개의 이음새를 공유한다. 특히 수록작 「폭력의 기원」은 그의 유년과 맞닿아 도시 철거촌의 익숙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때가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절골을 뛰어놀며 전쟁놀이와 구멍가게 서리로 하루를 보내는 소년들. 도끼로 “네 형 발목을 찍어줄 거야”라는 아이의 천진하고도 순수한 폭력성은 누구나의 어린 시절 속에 숨은 기억의 한구석을 간지럽히기도 한다. 또한 평범한 일상 속에 기이한 상황을 주입함으로써 기이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는 점도 「일천구백팔십 년대식 바리케이드」나 「항구적이며 정당하고 포괄적인 평화」 등 여러 수록작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힘이 있고, 특별할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따라 읽게 되는 그의 매력적인 문체도 여전하다. 한편으로 이전 작품들과 다른 맺음새, 그를 ‘새로운 백민석’이라고 불러 마땅한 이유들도 있다. 기발표작에서 사라진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가령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는 발표 당시 “믿거나말거나박물지 둘”이란 제목의 연작에 포함된 두 에피소드 중 첫번째 에피소드만 덜어낸 것이고 「연옥 일기」는 두번째 에피소드의 후일담 형식으로 수정되었다. 두 에피소드 모두 사건의 배후를 초국적기업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의 음모로 거론하는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항구적이고 정당하며 포괄적인 평화」 역시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의 음모를 연상시키는 부분은 삭제되었다. 거대한 시스템의 체계적인 음모를 상징했던 이 회사가 사라진 것은 왜일까?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돌아오기 전에, 무엇인가 자신의 소설을 떠받치고 있던 아주 거대한 지주를 버리고 돌아온 셈이다. [……] 미루어 보건대 그는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를 버림으로써, 자신의 이전 작업과 완전히 결별하고 싶었던 듯하다. [……] 그는 지난날의 백민석을 ‘버리고 돌아온’ 백민석이다. 이 작품집의 작품들은 따라서 모두 신작이다. 그것들은 이 작품들이 발표되던 당시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다._해설 「무표정하게 타오르는 혀」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백민석은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가. 신작 두 편 중 표제작 「혀끝의 남자」는 그가 여는 새로운 문 앞에 무엇이 있을지를 가늠해보게 한다. 어쩌면 나는 혀끝의 신을 본 것일 수도 있다. 남자도 여자도 인간도 아니라면 방금 내 혀끝에서 태어난 신일 수도 있다. 일억이나 되는 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오 분 전에 내가 새로 구워낸 신일 수도 있다. 신이라면 나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 혀끝이 종교의 발상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_「혀끝의 남자」에서 그가 돌아오며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첫 소설은 인도에 다녀온 이야기다. 인도 여행기라기보다는 “머리에 불을 이고 혀끝을 걷는 신”에 대한 이야기다. 장바닥에서 구걸을 하는 ‘뼈마디가 다 꺾여서 구겨진 듯한 소년’과 그는 이 완전히 무의미한 세계에 내던져진 비참을 공유한다. 백민석을 아는 독자든 모르는 독자든 그가 천착하는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운명’, 그 분노를 새롭게 나눠 갖게 될 것이다. 한때는 편의점에 급습해 팝콘 봉지를 찢어발기거나 노인의 항문에 우산을 꽂아 넣는 그 미칠 듯한 화를 세상으로 쏘아 올리기도 했지만, 한때는 자기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묵묵히 견뎌보았던 이 세계에 대한 분노. 표정도 없고 신음도 없이, 삶을 삶답게 하기 위해 백민석은 절체절명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견뎌냄으로써 지속되는 삶의 우울을 위로하기 위해 인류가 불러낸 일억의 신을 뒤로 하고 백민석은 자신만의 신을 소환한다. 그 신은 머리에 불을 이고 혀끝을 걷는다. 오직 혀 위에서 불탄다. 이 신을 발견하는 일은 그가 언제나 소설가였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불타는 혀를 간직한 그에게 삶이라는 고행은 언제나 진행 중이었다. 원숙한 내려놓음이나 익숙한 문장이 아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설을 살아온 백민석의 완전히 새로운 문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