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내용이 끝없이 전복되는 미지의 항로,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그다음의 시’
배시은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소공포』가 민음의 시 304번으로 출간되었다. 배시은 시인은 독립문예지 《베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질서와 반복으로부터 미묘하게 벗어나 있는 내용과 형식의 추구를 통해 그만의 고유한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배시은의 독특한 시선과 언어 실험은 시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향한다. “우리는 곧바로 그다음 상황에 놓인다”는 「자서」의 선언적인 문장처럼, 페이지마다, 연과 행마다 의외의 상황과 언술들이 부지런히 이어진다. 시집 『소공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장면을 향하는 배시은의 독특한 시선과 함께 더불어 기존의 형식과 내용을 재배치하여 그 너머를 도모하는 시적 시도가 두드러지는, 배시은 시 세계의 첫 결실이다.
『소공포』에는 모두가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소원을 비는 가운데 소원의 내용에 주목하는 대신 아무도 그 소원의 내용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역소원」) 발생하는 낯선 정서와, 기존의 기호와 형식을 활용해 새로운 시를 도모하는 낯선 형식이 함께 존재한다. 내용과 틀이 끊임없이 전복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동성의 시집 『소공포』는 이렇게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알리며 시의 또 다른 미래를 열어젖힌다.
■ 구멍 너머 펼쳐질 뜻밖의 장면들
소공포는 구멍이 뚫려 있는 멸균된 면포로 지금은 나의 얼굴이다 나의 얼굴은 구멍이 뚫려 있는 멸균된 면포로 너의 얼굴에 내려앉는다 너와 나의 얼굴은 하나의 얼굴이다
얼굴은 접히거나 펼쳐진다 얼굴이 겹겹이 쌓인다
―「소공포」에서
시집 제목 ‘소공포’는 단어 자체로 끊임없는 “그다음 상황”(「자서」)를 만들어 낸다. ‘소공포’를 마주한 우리는 단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작은(小)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다음,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검색을 시도할 것이다. 또다시 다음, 단어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당황한다. 마침내 온라인상에서 그것이 치과나 외과 진료 시 수술 부위에 덮는 초록색 면포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고 있음을 눈치챈다.
‘소공포’의 쓰임새 역시 겹침을 통해 “그다음 상황”을 엿보게 하는 물건이다. 소공포가 수술 부위에 가닿는 순간, 구멍을 통해 드러난 부위에서는 우리가 기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궁금해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시집 『소공포』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겹침’들은 어김없이 독자들을 이다음의 공간과 시간으로, 단어와 문장의 우연적 접합이 만들어 낸 의외의 형상 앞으로 데려간다. 배시은이 배치한 상황의 연쇄를 따라 고요한 미지의 모험을 떠나 보자. 다음 장에 도사린 순간은 나의 예측과 얼마나 같을까? 혹은 얼마나 다를까?
■ 용감하게 다음 단계를 도모하는 시
무엇이든 액자에 가둬 봐
「이렇게」
「그럴듯하게」
마지막 날을 피해서 「마지막 날 전날의 전시장」에 왔다
작가의 일생이 벽에 붙어 있다
작가는 「작가의 일생」에 동의한 적 있을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해 버렸다」에서
『소공포』가 예상치 못한 장면들로 가득한 이유는 배시은이 내용과 형식을 모두 품는 시적 시도에 부지런한 시인인 덕분이다. 김뉘연 시인이 작품 해설에서 짚었듯, ‘언어’란 단어와 문장을 통해 하나의 내용을 형성하는 수단이고, ‘기호’란 ‘언어’로 형성된 내용을 이미 받아들인 채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사회적 약속이다. 배시은의 시는 이미 굳어진 기호에 의외의 내용을 담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등 언어와 기호의 특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홑낫표 기호(「」)를 액자라고 정의하면 무엇이든 액자에 담긴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선언의 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해 버렸다」가 마지막 행에서 “용기”를 말하며 끝을 맺는 이유는 무엇일까. 배시은은 언어와 기호의 메커니즘을 깊이 이해하고, 그로부터 시의 이다음 단계를 도모해 보려 한다. “「무엇이든」 액자에 가두”어 보려는 그의 시도와 실험은 용기가 없다면 불가하며, 이 작고 단단한 용기로부터 비로소 그의 시가 미래를 향해 귀중한 발자국을 내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