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인생 황혼기의 바그너가 베토벤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자신의 예술적 정신적 스승 베토벤에게 바치는 베토벤 전기.
단편소설 ‘베토벤 순례’, ‘교향곡 9번 해설’ 등 관련 글 5편 수록.
“내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소원만 맴돌았다. 베토벤을 만나자!” -13쪽
“타락한 낙원의 황야에서 이 위대한 선구자를 칭송하자! 독일의 용기가 거둔 승리 못지않게 그를 귀하게 칭송하자. 세계의 은인은 세계의 정복자보다 더 높이 있으니!” -197쪽
“1829년 4월, 열여섯 살의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관람했다. 그 경험은 그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음악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화성학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직접 작곡도 하면서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 그에게 베토벤은 영감과 영향을 주는 음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본질, 더 나아가 세계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였다.” -‘옮긴이의 말’에서
“타락한 낙원의 황야에서 이 위대한 선구자를 칭송하자!”
바그너가 소설도 썼다고? 그렇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독보적인 극예술을 창조한 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광범위한 저술 활동을 펼친 저자로도 유명하다. 오페라 대본을 직접 쓴 것은 물론이고 음악, 예술, 정치, 사회, 종교를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썼다. 1871-73년에는 자신이 썼던 글을 모아 아홉 권짜리 《저술 및 문학 작품 모음집》을 출간했는데, 여기에는 베토벤에 관한 글도 여러 편 실렸다.
이 책은 바그너의 음악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베토벤의 삶과 베토벤의 음악을 바그너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잘 보여주는 중요한 글 다섯 편을 골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독일에서 음악학을 공부한 전문 번역가 홍은정이 충실한 옮긴이 주와 후기를 통해 다소 난해할 수도 있는 글의 이해를 돕는다. 위대한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탄생 250주년(탄신일은 12월 16일)인 2020년, 두 음악 거장의 만남을 조명해 온 포노 출판사의 ‘거장이 만난 거장’ 시리즈 여덟 번째 책이자 올해 베토벤을 중심에 세운 세 번째 책이다.
맨 먼저 실린 글은 바그너가 27세 때인 1840년에 쓴 단편 소설 〈베토벤 순례〉다. 바그너는 젊은 무명 작곡가가 자신의 우상인 베토벤을 만나는 꿈을 이룬다는 유쾌한 허구의 이야기에 ‘순례’라는 경건한 제목을 붙여, 절치부심하며 지내던 파리에서 잡지에 발표했다. 힘겹던 시절 스스로를 독려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까. 성공한 음악가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빌려, 바그너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에세이 〈베토벤〉은 〈베토벤 순례〉가 발표되고 30년이 지난 1870년에 쓴 묵직한 베토벤 음악 평론 겸 전기다. 그리고 이 두 글 사이에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 연주 보고서 및 작품 해설(프로그램), 베토벤 교향곡 3번(‘영웅’)과 〈코리올란 서곡〉의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다. (글이 수록된 순서는 발표한 연도순이다.)
수록된 글 살펴보기
베토벤 순례(1840)
바그너가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음악은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이었다. 그때 이후로 줄곧 그를 흠모해 온 베토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상상의 순례 여행을 그린 소설이다. 이 글을 쓸 당시 바그너는 독일에서 큰 빚을 지고 파리로 도피하여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1839년 말부터 1842년 4월까지). 그때 생활을 위해 잡지에 기고했던 글 가운데 하나다. 바그너의 분신인 무명의 작곡가 B씨가 베토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여정과 빈에서 벌어지는 해프닝, 베토벤과의 만남을 성가시게 방해하는 거만한 영국인 신사와의 얽힘, 베토벤과의 극적인 만남과 작별, 다소 코믹한 결말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에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을 바그너는 우상과의 상상 속 만남으로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지 않았을까? (최초에 수록된 곳은 음악 잡지 〈라 르뷔 에 가제트 뮈지칼 드 파리La Revue et Gazette musicale de Paris〉 1840년 11-12월호.)
실제로 베토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바그너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고,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비록 허구지만, 바그너와 베토벤이 나누는 상상의 대화 속에는 바그너 음악극의 이론적 핵심이 될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서 그는 베토벤의 입을 빌려 “혼란스러운 창조의 순간에서 생겨난 원초적 감정 자체를 재현하는” 기악과 “인간의 마음과 그 안에 담긴 배타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대변하는” 성악의 통합을 역설하고 그 과제를 해결한 “합창이 있는 교향곡”을 언급한다. (203-204쪽, <옮긴이의 말>)
1846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 보고서(1846)
바그너는 1843년 2월에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의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어, 1849년 드레스덴 혁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1846년 4월 5일 성지 주일 음악회에서 그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보고서다. 여기에는 이 작품에 대한 음악적 해석뿐만 아니라 음악회를 열게 된 동기, 반대자들을 설득하는 문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구성과 배치, 악기 편성, 음악회 준비와 연습 과정, 연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합창 교향곡’의 연주를 둘러싼 모든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바그너가 연주할 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단 한 번이었고 그 기회를 베토벤 교향곡 9번에 할애하려 했으나, 연금 기금을 관리하던 오케스트라 위원회가 수익성 문제로 반대하자 스스로 필요한 비용을 빌리고 이 곡을 처음 듣게 될 드레스덴 청중의 이해를 돕도록 작품 해설(프로그램)을 집필하는 등 온갖 노력을 쏟는다. 이때 쓴 프로그램은 “곡에 대한 비판적 판단이 아니라, 청중의 느낌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작품을 편안하게 이해하게 하는 일종의 지침서 같은 것”으로,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중요 구절들을 가져와 각 악장을 해설한 글이다. 바그너는 이 해설을 당시 드레스덴의 관보에 미리 실어 청중의 이해를 최대한 끌어올리려 애썼는데,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연주회 수입이 크게 늘었고 향후 9번 교향곡을 정기적으로 연주하기로 했다고 보고한다. 이 글은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열린 음악회에서도 사용되었고 크게 호응을 얻었다.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1851),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1852)
1849년 드레스덴을 탈출한 바그너는 1860년대 초 독일 추방령이 해제되기 전까지 스위스 취리히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850-55년에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 시기에 그가 주로 선보인 음악은 자신의 음악과 베토벤의 음악이었다. 이 두 글 역시 그 당시 바그너가 연주회를 앞두고 청중을 위해 프로그램 형식으로 작성한 글이다.
베토벤(1870)
1870년 9월 11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발표한 글. 1870년은 베토벤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다. 바그너는 “위대한 베토벤의 탄생 100주년 축하에 어떤 식으로든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소중한 기회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느꼈기에 베토벤 음악이 지닌 의미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적어보기로” 작정한다. 짧은 머리말, 본문, 미발표 결론으로 구성된 상당히 긴 글이다. 바그너는 이 글을 통해 “음악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탐구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음악 철학을 고찰해 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특히 1854년에 처음 저작을 접한 뒤 그의 음악 이론에 깊은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의 이론에 기대어 베토벤의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