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강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살기 위해 땅 아래에 내려갔으나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한 사람들, 어둠 속에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다 죽어간 사람들 … 역사에서 언더그라운드에 매장된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의 표면 그 아래 어딘가에는 지상의 무게를 견디며 빈 채로 남아 있는 지하구조물들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을 수 있으나 그곳에는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살기 위해 들어갔던 사람들, 이름 없이 고통 속에 죽어간 사람들, 언더그라운드에 매장된 사람들이 있었다. 오래전 인류가 자연환경과 맹수의 습격을 피해 생명을 잉태하고 보듬던 굴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제로 끌려가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의 공간이 된 것이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의 땅 아래 지하 공간에 남아 있는 제국주의와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포진지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덕도에서부터 시작해 서울, 부산, 시모노세키, 지쿠호, 나가사키, 나가노, 제주도, 지란, 오키나와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이후 생겨난 비무장지대 등을 찾아간다. 2014년부터 터널이나 굴 등 지하구조물을 찾아다니며 ‘트래블로그’라는 형식으로 카메라에 담아 다큐멘터리 「언더그라운드」를 만든 가족 영화제작사 ‘욱희씨네’의 허욱 감독과 양희 제작자(작가)가 다큐멘터리 영상을 사진으로 정리하고, 글을 덧붙여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저자들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지하구조물들을 의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누가, 왜, 무엇을 위해 그곳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표면 그 아래에 남겨진 역사를 사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1장 지상의 무게를 견디며-서울 2017년 10월에 공개된 서울의 비밀 지하 공간 세 곳을 찾아 나선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건설된 대규모의 경희궁 방공호, 군사정권 때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의도 지하 벙커(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분관 세마(SeMA)), 그리고 1974년 지하철 1호선 건설 때 만들었다가 노선이 변경되면서 유령역이 되어버린 신설동 지하 폐역 등을 찾아간다. 아직도 언제 왜 누가 만들었는지 명확하지 않은 지하구조물들이 있을 것이다. 제2장 이곳을 발판으로-가덕도 부산과 거제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 가덕도. 요즘에는 신공항 건설로 주목받고 있으나 가덕도는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대가 설치되는 등 오래전부터 한반도 남단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가덕도는 러일전쟁 때부터 침략과 수탈의 역사 전면에 서게 되는데, 이때 만들어진 외양포의 포진지를 비롯해 일본군이 사용하던 관사, 막사, 위병소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해방 이후 이 일대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토지나 가옥이 국방부 소유로 귀속되면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제3장 일본까기 최단거리-부산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강제 동원은 부산이 출발지였다. 1938년 일제는 중일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동원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제국 신민을 징용해서 총동원 업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인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기업이 운영하는 탄광과 군수공장 등 약 3,900곳의 작업장에 최소 65만 명 이상이 강제 동원되었다고 한다. 강제 동원의 참상을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등을 찾아본다. 제4장 바다를 건너면-시모노세키 부산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에 내린 조선인들은 탄광이나 제철소로 가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굶주림과 구타에 시달렸다. 조선인 노동자 상당수가 투입되어 공사가 진행된 시모노세키와 규슈의 기타큐슈를 잇는 간몬(關門)터널, 6천 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 동원했었으나 강제 동원 피해 보상을 회피하고 있는 야하타제철소(지금의 일본제철) 등을 찾아가본다. 그리고 바닷물이 유입되는 사고가 났을 때 2차 피해를 막는다고 갱도를 닫아버려 사고 당시 탄광 안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 135명이 수장되어버린 해저 탄광인 조세이 탄광을 찾아간다. 조세이 탄광 사고에 대해서는 원인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근에 조선인 희생자 136명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가 세워졌을 뿐이다. 제5장 아래로 아래로-지쿠호 지쿠호 지역은 일본 석탄 생산량의 40∼50퍼센트를 차지하는 일본 최대 탄광촌이었다. 미쓰이 소유의 다가와광업소, 미이케슈지칸이라는 형무소의 죄수들을 동원하여 가혹한 노동으로 유명한 미이케탄광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많은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 다가와광업소에는 다가와시 석탄역사박물관을 세워 석탄 관련 자료와 탄광 기록화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미이케탄광은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6장 도망칠 수 없는 지옥-나가사키 1945년 히로시마에 이어 원자 폭탄이 투하된 나가사키는 태평양전쟁 때 군수산업의 요람이었다. 1873년 나가사키에서 미쓰비시상회로 출발한 미쓰비시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초대형 전함 무사시(武藏) 군사용 선박 건조, 어뢰 등을 만드는 병기 제작소, 제강공장, 각종 탄광 등 일제 침략 전쟁을 뒷받침하는 작업장들을 나가사키 곳곳에서 가동했다. 우리에게 군함도(軍艦島. 군칸지마)라고 알려진 하시마섬도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 탄광이었다.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 동원되어 지옥 같은 노동에 시달렸다고 지옥섬이라 불렸다.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나 군함도가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조선인 강제 동원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제7장 누군가는 그곳에-나가노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나가노는 일본의 대표적인 산악지대로, 1944년 나가노 근교 에 있는 마쓰시로에 대본영(참모본부)을 옮기기 위한 지하호 공사를 시작했다. ‘본토 결전’에 대비해 도쿄 궁성(현재의 황거)에 있던 대본영을 옮기려는 것이었다. 이 공사에 1만여 명의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원되었는데, 조선인은 7천 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지하호 안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죽은 동료의 얼굴, 고향 마을 이름, 한글로 추정되는 글귀 등이 남아 있다. 제8장 온 섬이 눈물 구멍-제주도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제국은 일본열도와 제주도의 절대 사수를 위해 수립한 결호(決號)작전에서 결1호인 홋카이도를 시작으로, 도호쿠, 간토, 도카이 간사이, 규슈에 이어 결7호 지역인 제주도를 공격과 방어를 위한 진지로 만든다. 해안 절벽이 아름다운 수월봉에 갱도 진지를 구축했으며, 알뜨르비행장을 비롯해 정뜨로(현재의 제주국제공항) 그리고 진드르에 비행장을 만들었다. 송악산 해안가에도 해안 진지가 있는데 송악산의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성산일출봉의 해안 동굴에도 18개의 벙커형 동굴 진지가 있다. 제주도 오름 368개 정도에 3분의 1이나 되는 120곳에 일본군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 제9장 죽음을 명령하다-지란 일본 규슈의 남쪽에 위치한 지란은 가미카제 특공 기지인 지란 기지로 유명하다. 가미카제는 미쓰비시에서 생산된 전투기 제로센에 250킬로그램의 폭탄을 싣고 날아가 연합군 함대에 자살 공격을 하는 일본군 특별공격대였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출격했던 이 지란 기지에는 현재 특공평화회관이라는 박물관을 세워 당시의 비행장 터는 물론 급수탑과 상륙 훈련시설, 방화수조, 탄약고 등과 특공대원들이 쓴 유서와 편지 등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출격했던 지란 기지에는 평화라는 이름을 달고 전쟁과 죽음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10장 자살의 언덕-오키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