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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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바람에 실린 한 소설가의 꿈 젊어서 죽은 문학가가 더 살아 있었다면…이라고 상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나카지마 아쓰시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본에 그와 같은 문학가는 없기 때문이다. ―사이토 마리코, ‘서문’에서 “문학을 창작하는 일. 그것은 기쁨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었으며 그저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 삶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나는 누에였다. 누에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고치를 짓지 않으면 안 되듯이 나는 말의 실을 가지고 이야기의 고치를 지었을 뿐이다. 그래서 가엽고 병약한 누에는 결국 그 고치를 다 지었다. 이제 그에겐 생존의 목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138쪽)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 1909-1942)는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산월기」, 「이능」 등 빼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산월기」는 호랑이가 되어버린 한 시인의 이야기로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고전이다. 이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에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빛과 바람과 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논픽션 같은 픽션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뚱딴지같이 일본 소설에 웬 스티븐슨이냐고? 이 소설은 영국의 소설가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사모아 섬에서 새로운 터전을 일구면서 겪는 이야기로, 1인칭 시점인 스티븐슨의 일기와 상황을 설명하듯 전개되는 3인칭 화법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마치 두 작가, 스티븐슨과 나카지마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착각을 독자에게 불러일으킨다. 이 책에는 아쓰시의 수필 「판다누스 나무 아래서」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아쓰시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이 수필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소설가로서의 소신을 표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지켜내야 할 문학가의 태도를 밝히고 있는데, 「빛과 바람과 꿈」과 시공의 궤를 같이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어로 시를 쓰는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청아한 시세계로 담아낸 시인 사이토 마리코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일본 문학의 독자적인 별’, 나카지마 아쓰시를 추억한다. 두 천재 작가의 평행이론 “돼지들 장난이 너무 심해서 걱정이다. 유럽 돼지들처럼 문명으로 인해 거세당한 놈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실로 야성적이며 활동적이다. 씩씩한데다가 어찌 보면 아름답기조차 하다.” (15쪽) “고요하다. 내가 휘두르는 도끼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화려한 푸르름 속의 적막함! 한낮의 거대한 침묵 속의 두려움!” (17쪽) “바다의 굴이나 박쥐 같은 자들의 마음에 들려고 재미도 없이 심각하고 구태의연한 작품을 내가 왜 써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쓸 것이다.” (103쪽) “내가 별 볼 일 없는 문학가라고? 깊이가 없다고? 철학도 없고?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하라지. 한마디로 문학은 기술이다. 개념을 가지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도 실제로 내 작품을 읽으면 아무 말도 못하고 매료될 게 분명하다.” (153쪽) 식민지 사모아에 대한 이야기에 지배국과 피지배국에 대한 그의 생각이 분명히 나타나 있고 삶과 소설에 대해서도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스티븐슨의 따뜻한 마음은 작가의 마음처럼 다가오고, 그의 꺼지기 바로 직전의 불타오르는 짧은 삶 역시 작가의 삶과 비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남아 있는 삶이 얼마 되지 않는 두 위대한 작가의 삶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폐병에 시달리는 소설가 스티븐슨은 요양할 곳을 찾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남태평양의 사모아 섬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다. 열한 살 연상인 미국인 아내와 그녀의 장성한 아이들까지 줄줄이 데리고 시작된 사모아 섬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은데…. 나카지마 아쓰시는 실제로 요양차 떠난 사모아 섬에 정착해서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스티븐슨의 삶에 주목한다. 평생 천식으로 고통받았던 아쓰시는 역시 병약했던 스티븐슨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같은 작가로서의 열정과 고뇌를 발견해냈다. 아쓰시는 1920년 한문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경성으로 이주, 용산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다녔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험은 훗날 「호랑이 사냥」, 「순사가 있는 풍경」 등 조선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된다. 군국주의 일본의 지배하에 자유롭지 못한 암담한 시절을,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아쓰시의 소설은 식민지 조선을 그린 일본 작가의 보기 드문 작품이기도 하다. 「빛과 바람과 꿈」 역시 배경이 조선에서 사모아 섬으로 바뀌었을 뿐, 지배와 억압의 문제에 대한 목소리는 여전하다. 유럽 열강이 저지른 식민지 약탈과 만행에 분노하여 고발의 글을 쓴 스티븐슨은 사실 아쓰시의 분신에 다름 아닌 것이다. 허구와 사실이 뒤섞여 있어 스티븐슨의 생각인지 아쓰시의 생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러면서 두 작가의 목소리가 함께 한 목소리로 담겨 있는 이 작품은 시간을 초월한 진실에 다가간다. 문학적으로 만개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천재 작가 나카지마 아쓰시. 그의 생전에 유일하게 출간된 작품 『빛과 바람과 꿈』. 이 소설은 1942년 상반기 제15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지만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시기라 수상작이 없었다.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작품이 적합하지 않다니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미행의 다섯 번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