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1. 키치란 무엇인가?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뒷받침된 미학,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이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이다. - 밀란 쿤데라
키치는 미학적 체험이라는 외투를 걸친 채 예술이라도 되는 양 야바위치면서 전혀 이질적인 체험을 슬쩍 끼워 넣어 감각 자극의 목표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해하려고 어렵게 애쓰기보다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미의 가치 체계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게으른 청중에게는 이상적인 음식이다. - 움베르토 에코
키치가 내세우는 요구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예술이고,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 - 아놀드 하우저
‘키치’라는 용어를 여러 매체를 통해 심심찮게 접하지만, 정작 그 의미가 모호한 채로 사용되고 있다. 키치만큼 일상적으로 쓰이면서도,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로 알려진 용어가 또 있을까? 일말의 긍정적 요소도 지니지 않은 명백히 ‘나쁜’ 것임에도 어떻게 키치는 그럴듯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까? 키치는 19세기 말에 처음 나타나 예술의 영역에서만 사용되며 머물러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업화, 매스컴의 발달과 함께 급속히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저 ‘진짜를 흉내 낸 가짜 싸구려 예술품’이라는 예술의 상업화와 소비재로서의 예술을 비꼬는 의미에서 출발한 키치가 어느 틈엔가 문화적 의미를 가진 미적 논의의 대상으로 그 위치가 올라가고 이제는 대중문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까지 그 개념이 확대되었다. 키치라는 용어가 비교적 현대에 가까운 기원을 가지고 있고 개념이 명확하게 자리 잡기 전에 느슨한 채로 널리 사용되었다고는 해도, 이 같은 현상은 키치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며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조중걸 교수의 은 키치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키치를 우리 삶과 세계를 타락과 파멸로 이끄는 독소로 규정하고 그 정체를 해부하고 폭로한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키치’의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한 탐구를 하는 책이 아니다. 기원을 찾고 정의를 내리는 무의미한 탐구보다는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자리 잡은 키치가 어떤 모습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극복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실제적 유용성에 맞춰 펼쳐진다. 키치의 출현과 확장에 맞서 거짓 낭만과 삶의 기만적 행복에 반항하며 외로움과 소외 속에서 분투했던 예술가들의 투쟁처럼 이 책 또한 키치에 잠식되어 있는 실존을 되살리려는 저자의 외로운 투쟁의 결과물이다.
2. 키치의 극복은 ‘그것을 위한 그것’, 실존에 있다!
예술비평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키치라는 용어가 이제는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용어를 넘어서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삶의 양식이 되었다. 문제는 이 ‘키치’라는 용어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에는 통속적 주제를 방법론적으로 냉소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인 척 교묘한 거짓 가면을 쓰고 오도하여 이를 추종하는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한 편으로는 싸구려임을 자처하는 B급 문화에 자신을 덧씌워 경계를 흐려가고 있다. 즉, 키치는 스스로 아방가르드를 표방하면서도 대중문화의 새로운 한 축으로 트렌디하고 독창적이라거나 의도적으로 주류를 거부하는 독특한 비주류의 문화라는 다소 긍정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키치는 고급예술에 기생할 뿐이지 아방가르드가 아니다. 또한 의도적인 유치함이나 진부함을 보이지도 않는다. 자신이 B급 아류임을 공표하는 것은 키치가 아니다.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기만을 자양분으로 하는 키치에게 자칭 ‘키치’는 있을 수 없다. 키치는 그렇게 솔직하지 않다. 키치는 좀 더 내밀하고 치밀하고 진지하고 엄숙하다.
누가 키치를 지지하고 번성시키는가? 키치라는 달콤한 독약을 들이켠 자들이다. 영원히 죽지 않을 메피스토에게 거짓 낙원을 제공받는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위탁한 그들은 자신의 거짓 낙원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가짜임을 잊기 위해) 파멸의 길로의 동참을 권유한다.
그야말로 키치의 전성시대라고 할만하다. 우리 삶 곳곳에 키치가 만연해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키치이다. 키치 예술가, 키치 종교인, 키치 정치가, 키치 지성인, 키치 학자 등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 자신이 의미를 찾아주는 구세주라고 큰 목소리로 떠들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시대착오의 길로 이끈다. 무의미와 상실이라는 절망 속에서도 분투하라고 독려하기보다는 허영과 기만으로 공허한 마음을 채운다. 거짓 이미지에 불과할 뿐인 작품에 창조와 독창성이라는 그럴듯한 의미를 덕지덕지 붙이는 예술가, 세속의 것에 탐닉하며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고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나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는 종교인, 재난 현장에 찾아가 카메라 앞에서만 피해주민의 손을 잡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정치인, 학문적 성취보다는 사회적 명성이 더 중요한 학자, 지식 밑천 없이도 있는 척, 아는 척 양비론을 구사하며 이미지 관리로 밥벌이를 하는 지성인. 키치는 뻔뻔한 자기기만과 오만에 심오한 의미를 덧붙여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만들어 조종하고 있다. 이러한 키치인간이 넘쳐나는 곳에 슬프게도 키치에 열광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비판과 검열의 과정은 사라지고 상스럽고 비천해도 유명해지면 그만, 재밌으면 그만, 돈 잘 벌면 그만이라는 자기기만과 허영이 빠르게 우리 삶과 사회를 잠식해가고 있다. 이러한 키치의 융성은 결국 독재와 속박으로 이어져 문명을 쇠퇴시키고 우리를 몰락시킬 것이다. 달콤한 독약의 끝은 파멸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키치를 극복할 것인가?
저자는 키치의 특징 중 하나인 ‘이차적 눈물(the second tear)’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꼽는다. 길에서 구걸을 하는 불쌍한 아이를 보며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일차적 눈물이라면 이후 아이를 불쌍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나 자신의 대견함이 바로 이차적 눈물이다.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관심이 집중되는, 이러한 허영과 감상으로 뒤범벅된 이차적 눈물이 바로 키치의 굳건한 토양이다.
모든 죽음은 의미의 상실이다. 이데아의 죽음과 함께 고대가 몰락하고 신의 죽음과 함께 중세가 몰락하고, 본질의 죽음과 함께 근대가 몰락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두 발을 디딜 탄탄한 대지를 잃고 발가벗겨진 채 실존이라는 의미의 부재 속에 내던져졌다. 우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매일 새로운 건설과 새로운 파산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오직 매 순간을 살아가는 활동만 남아있을 뿐이다. 즉 실재가 소멸한 현대에서 예술은 표현을 통한 심미적 활동으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 일차적 눈물에 집중하여 ‘삶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며,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그것’ 이외에 이차적으로 덧붙여진 모든 의미는 키치이다.
물론 키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가난과 몰이해뿐이라고, 사랑을 위한 사랑은 헛된 환상이라고, 삶을 위한 삶은 불행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그보다는 부조리한 현실 따윈 잊고 편안함과 안락함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라며 달콤한 말들을 속삭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사랑을 위한 사랑을, 삶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이자 가치관이며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바와 같이 “말해지는 것(what can be said)”이 아닌 “보여져야 하는 것(what must be shown)”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한 손에는 ‘건강한 불행’이라는 빨간 약을, 다른 한 손에는 ‘병든 행복’이라는 파란 약을 내민다. 분투하고 저항하는 나로 살 것인가, 눈을 감고 기만 속에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