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중문화계를 움직이는 힘,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제 134회 나오키 상을 수상하기도 한 저력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걸작 《환야》가 출간됐다. 20년이 넘는 작가생활 동안 60여 편에 달하는 많은 소설을 펴낸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야베 미유키와 마찬가지로 일본 대중문화계를 움직이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상품성과 문학성을 모두 아우른 그의 작품들은 16편이 드라마화 됐으며, 《호숫가 살인사건》《게임의 이름은 유괴》《비밀》이 영화화됐고, 2007년에 《편지》의 영화 개봉이 예정되어 있을 정도로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환야》는 일본에서만 20만부 이상 팔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으로 나오키 상 후보작이기도 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데뷔 후 총 6번이나 나오키 상 후보에 올랐다가 6번째 작품으로 결국 상을 거머쥐었는데 5번째 후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던 작품이 바로 이 《환야》다.
너무나 환상 같은, 그래서 허무한 ‘도깨비’ 같은 밤
제목 《환야(幻夜)》는 말 그대로 ‘환상 같은 밤’을 의미한다. 비록 주변은 낮처럼 밝다 해도 ‘가짜’일 수밖에 없는 밤.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기묘한 밝음에 휩싸여 있는 밤’ 그리하여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허무한 밤’이다. 여주인공 미후유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밤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설사 주변은 낮처럼 밝더라도 그건 가짜야.”
《환야》는 그 ‘밤길’을 걸어가는 여주인공 미후유와 그녀의 파트너 마사야의 가슴 아픈 사랑과 배반의 참혹한 이야기다.
1995년 겨울. 무려 5천 명의 사망자와 1만 5천 명의 부상자를 낸 고베대지진. 그 대혼란 속에서 마사야는 빚 독촉을 하던 외삼촌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만다. 이를 우연히 목격한 미후유라는 여성과 운명처럼 얽힌 그는 고베대지진의 피해상황이 일단락되자, 동경으로 향한다. 그러난 그 동경에서 그들은 ‘낮’이 아니라 ‘밤’의 삶을 택한다. ‘낮의 환한 길’이 아니라 ‘밤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설득하는 미후유에 의해 마사야는 그녀의 ‘그림자’로 살기로 한다. 밤에만, 그것도 변장한 채 자신을 찾아오는 미후유. 그녀와의 그 짧고 헛된 ‘밤’을 지키기 위해 그는 미후유의 ‘그림자’가 되어 협박과 납치, 살인까지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세상물정에 밝고 재능 넘치며 과감한 결단력을 지닌 미후유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아름다움’을 향한 각종 비즈니스를 성공시켜 나가고, 마사야는 그녀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손발이 되어 움직인다. 그 사이 미후유는 보석 업체 사장과 결혼을 하고 자신의 과거를 캐려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응징하며 승승장구해 간다. 그러면서 마사야는 알게 된다. 미후유가 이제껏 자신에게 선사한 그 ‘밤’은 모두 ‘가짜’였음을, 아니, 자신의 영혼까지 가져간 그녀조차 ‘가짜’였음을…
‘美는 권력이다’라는 확신으로 움직이는 강렬한 팜므파탈의 등장
이 작품에는 1990년대 일본사회를 관통했던 다양한 사회상과 키워드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야기의 도화선이 되는 고베대지진으로 서막을 연 작가는 동경으로 옮겨간 미후유와 마사야를 따라,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 남긴 불유쾌한 세기말의 이미지를, 그리고 곧 이어 버블 경제의 붕괴와 ‘아름다움’과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소비중심의,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도래가 남긴 흔적을 소설 곳곳에 심어놓고 있다.
미후유는 아름다움(美)이 대중을 움직이는 권력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예전에는 강압에서 권력이 발생했다면 이제는 유혹에서 권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아름다운 광고 사진이, 구구절절한 회사 이름보다는 강력한 브랜드 하나가 대중의 지갑을 연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본주의의 총화’와 같은 인물이다. 이마골로기(이미지가 곧 이데올로기인 시대)니, 메트로섹슈얼이니 하는 21세기의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미 1990년대에 예견해낸 ‘선구자적’ 인물이기도 하며, 현대여성의 욕망의 작동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예측해낸 여성이기도 하다.
작가는 미후유의 입을 통해 미가 곧 권력이 되는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제가 생각하는 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우선 터널이 있고, 입구와 출구가 있습니다. 입구에는 여자가 있습니다. 별로 예쁘지도, 화장기도 없고, 패션 감각도 좋지 않죠. 그렇지만 돈은 좀 갖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든 뭐든 해서 모은 돈이겠죠. 그녀는 그 돈을 갖고 터널 안으로 들어갑니다. 잠시 뒤에 나온 그녀는 예쁘게 메이크업 되어 있고, 헤어스타일도 잘 어울리게 바뀌어 있습니다. 약간 예뻐진 그녀는 또 얼마 있다가 다시 옵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돈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뻐진 덕분에 수입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다시 터널로 들어갑니다. 나온 그녀는 전보다 훨씬…."
이런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미후유는 이제껏 소설 속에서 보여준 그 어떤 팜므파탈보다도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주인공이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살인과 협박과 상해도 불사한다. 자신 때문에 버려진 인생과 영혼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오로지 성공과 부에만 인생을 거는 그녀. 섬뜩하고 소름끼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난 독자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인물이 충분히 있을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뛰어난 작가라는 사실은 이런 캐릭터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미후유라는 인물을 단순히 남자를 파멸시키는 단순한 팜므파탈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 지점이 《환야》를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소설 이상이 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작가의 전작인 《백야행》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환야》는 《백야행》의 속편이 아니다’라고 언급했지만 실제로 일본에서는 속편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작가는 《백야행》-《환야》에 이어지는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고 밝혀서 만약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환야》는 그 중간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백야행》의 악녀가 자라서 《환야》의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독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상이 이 소설을 읽는 묘미가 될 수 있겠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여러 입장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황폐해진 마사야의 영혼에서, 아니면 이 마성의 여자에게 홀리듯 빠져들어 수사를 계속하는 가토 형사의 입장에서, 그도 아니면 부와 성공을 위해 가차 없이 내달리는 미후유의 입장에서도 읽을 수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 소설을 만족스러움을 안겨줄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괴물 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의 윤곽을, 그 음영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결코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시대의 사회악과 부조리를 선명하게 고발해내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저력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