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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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람, 사랑에 관한 그녀만의 기억 저장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김민정 시인의 첫 산문집 제목을 '각설하고,'라고 지은 데는 내가 내 무릎을 찍게 될 때마다 그 구부러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빈번히도 불러다 앉힌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이라 함은 결국 내게 자주 필요한 말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터닝 포인트, 인생 팔십이라 친다면 나는 이제 구십 도로 구겨질 일만 남았다. 절반가량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 <작가의 말> 중에서 p.4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를 출간하며 솔직한 언어와 역동적인 감각으로 주목받아온 시인 김민정의 첫 산문집 《각설하고,》가 출간되었다. 등단 후 근 14년간 여러 매체에 연재했던 글 가운데서 묶어낸 이 책은 책을 쓰는 삶(시인)과 책을 만드는 삶(편집자)을 동시에 살아가는 그녀가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순간순간들의 등짝에다 찍찍 포스트잇을 붙여야 했’던 것들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시, 사람, 그리고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픽 웃기다가 쓸쓸하기도 하고 통쾌하다가 울컥하는 그녀의 글은 맛깔 난다. 경쾌한 문체와 리듬감 있는 그녀의 문장들은 때론 유머스러운 말장난처럼, 때론 한 편의 시처럼 읽는 사람의 가슴을 간질인다. 1부 <말이란 말이다>와 2부 <용건만 간단히>에서는 자고 일어나면 벌어지는 사건사고 앞에서 느끼는 분노와 불안한 안도감, 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부대낌과 연대감, 다정한 사람들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고마움의 글들을 담았다. 3부 는 그녀가 시를 쓰게 된 시작부터 시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와 마음을 풀어놓고, 4부 <시적인 순간들>에는 일상의 찰나에서 시로 뒤바뀌는 순간들, 5부 에서는 사랑에 대한 영감을 준 시 혹은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그리는 사랑의 여러 정의를 살피는 글들을 모았다. 김민정의 시와 또 다른, 일상의 언어로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녀의 산문 세계가 처음 열리는 순간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안도와 절망의 사다리 타기……. 시인의 눈에 비친 사회, 그 안의 당신과 나의 안부를 묻다 김민정의 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두 가지 풍경 위로 등장한다. 눈 오는 날이면 아침저녁 눈 쓰느라 바쁜 경비 아저씨, 전화 한 통이면 세제든 과일이든 작은 봉지에 담아 들고 현관 앞에 서 있던 슈퍼 아저씨, 늘어진 뱃살 그대로 드러내는 흰 속옷 차림으로 손님을 맞이하던 동네 빵집 아저씨, 집안 대소사를 서로 챙겨가며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동네 어른들이 등장하는, 사람 냄새 폴폴 풍겨가며 함께 살아가는 다정한 풍경이 그 첫 번째다. 가겟집 아줌마는 누가 누구네 아이인지 다 알았다. 그래서 외상을 달아도 부끄럽지 않았고 소풍날 아침 껌을 살 때면 콜라나 사이다도 덤으로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역으로 가겟집 아줌마네 아들이 고등학교에 갈 때는 이 집 저 집 사전을 사다 안겼고 그가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면 이 집 저 집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따끔하게 혼을 냈다. 친척보다 더 자주 보고 사는 이들이 가겟집 식구들이었다. 동네 엄마들은 늘 그곳에서 콩나물이며 두부며 고등어 같은 찬거리를 함께 사며 친목계를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동네 아빠들은 퇴근길 파라솔 아래 색색의 플라스틱 의자를 서로 당겨줘가며 맥주에 마른 멸치를 곁들인 채 서로의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친목계를 두텁게 다져나갔다. p.50-51. 다음 풍경은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경비 아저씨가 미처 쓸지 못한 눈길에 애가 넘어져 다쳤다고 항의하는 이웃,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사람들, 전기세가 아까우니 배달사원은 계단을 이용하라는 아파트 주민들, 응급실에서 마주한 시큼하고 퀴퀴한 죽음의 노숙자,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그토록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유서를 남긴 노부부, 돼지 300여만 마리를 한꺼번에 살처분하는 사람들,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현 시대의 살벌한 풍경이 그녀의 눈에 비친다. 목숨을 버린 노부부의 사연에 가슴이 뜸뜬 것처럼 뜨거워진 건 그들의 유서를 본 순간이었다. 시작이 그랬다지.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그토록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라고. 그 첫 줄은 읽자마자 화살표가 되어 내게 꽂혔다. 요즘의 내 화두 또한 그렇듯 삶의 부질없음 언저리를 뱅뱅 돌고 있는 탓이었다. 늦게 발견되는 바람에 대학병원에 원하던 시신 기증도 할 수 없게 된 노부부. 소리 나는 대로 적어나갔기에 마치 노인들의 나지막한 읊조림처럼 들렸던 글줄 사이에서 나는 노인의 자존심이 고스란히 엿보이던 한 문장을 찾아냈다. “부부가 살면서 빚은 한 푼도 없지만 살아 있는 집 보증금은 삼백만 원뿐이다.” 돈을 만든 우리들이 돈에 어쩌지 못해 스러져가는 나날……. 슬프다 진짜.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그토록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p.121 그녀는 솔직히 고백한다. 자신 또한 다르지 않은 한통속이라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에도 시간을 할애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그리고 다짐한다. 눈 쌓일 때면 피로회복제 들고 경비실을 찾아가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 부지런히 정리해 주변에 나누고, 무엇보다 훗날 누군가에게 시로 남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기로. 허무로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편으로써의 글쓰기 김민정 시인은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서 “내가 맘껏 뜯어먹을 수 있게 나를 구워준 나의 오븐이자 빵이며 우물거리는 입인 아빠 엄마, 당신들 덕분에 이리 배부른 나입니다.”라고 밝혔다. 이 책 3부 에 실린 그녀의 시론을 살펴보면, 아빠 엄마로부터 기인한 어린 시절의 정서부터 전공을 소설에서 시로 바꾸고 시와 함께 놀게 된 그 시작을 기록한다. 어느 날 누구 씨, 하기에 뒤돌아보니 글쎄 시라는 놈이 거기 턱 하고 서 있는 거예요.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대로 멈춰라, 하고 얼음땡을 제안했고 시와 나의 놀이는 시작부터가 난장질이었지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순간의 얼음과 땡, 술래와 숨은 아이 사이의 역전을 모두 경험하며 나는 시라는 어떤 강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요. 시를 말하라 할 때마다 내 머릿속과 가슴속은 엉킨 철수세미처럼 얼마나 거칠거칠했던가요. 온갖 생채기는 당연한 수순이니 해져 너덜거리는 정신머리로 나는 말을 낳고 말을 타고 말을 죽이느라 또 얼마나 새하얗게 밤을 지새워야 했던가요. 어김없이 창밖으로 계절은 오고 가고 꽃은 피었다 지고 사랑은 머물다 흐르고 물결을 따라 낳고 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게 절실하지 않은 건 엄살에 불과했으므로 나는 그 기막힌 풍경들은 달력 그림으로 벽에 걸어놓은 채 오로지 내 온몸의 통점을 통과해가는 만물의 심박동에만 귀 기울여나갔어요. 그러니까 네 시는 시가 아니야. 그럼 내 시가 소설이냐. 그렇게 말 많은 네 시는 시가 아니라고. 그럼 네 시는 말줄임표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데 여자인 ‘나’만의 이야기라니, 이해가 아닌 해석으로 마음이 아닌 콘택트렌즈로 시를 보는 사람들의 오만을 오판 삼아 나는 그들의 ‘말씀 그 가르침’을 반사하는 놀이에 늘 시를 초대했지요. 초대받은 이들이여, 고맙게도 시작은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겠어요. p.149-150. 이름 끝에 시인이라 이름을 단 이후 14년이 흘렀건만 그녀에게 시라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매 순간 두려우면서도 시를 써야 하고 또 다른 시인의 시를 묶어 시집을 만드는 일은 그녀에게 그저 사랑이라는 말로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