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겨울해협―이스탄불
내가 본 해협은 서양과 동양의 대지 사이로 깊숙이 파고든 바다의 칼날이었다.
보스포루스만큼 극적인 수로는 없다.
눈이 쏟아지던 날, 이 해협을 건넜다.
이곳을 건너려는 자는 누구나 짧은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리라.
2장 양의 창자로 요리한 수프―앙카라
아나톨리아의 수도 앙카라에서 식도락의 꿈을 탐한다.
옆자리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여자가 나타났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여자다.
양의 머리를 혀로 핥으며 연분홍빛 리큐어를 폭포처럼 부어넣는다.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떠도는 몸집이 큰 여자…….
그녀는 아나톨리아의 환영이었다.
3장 장미의 나날―지중해·앙카라
봄의 지중해는 성적性的이다.
해풍에 흔들리는 붉은 장밋빛과 그림자에 성과 죽음이 흩날린다.
성과 죽음의 봄, 장미의 여인이 세룰리언 블루의 바다 속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4장 몽해夢海항로―흑해
흑해의 물은 과연 검은 것인가.
오직 그 한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 흑해항로에 올랐다.
뱃길 위에서 하얀 바다를 꿈꾸었다.
그 하얀 바다에 나타난 괴어….
현실의 바다 위에는 성자의 풍모를 간직한 새 한 마리.
5장 이슬람 사색기행―시리아·이란·파키스탄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란을 거쳐 파키스탄의 카라치로,
보름달이 뜬 밤에는 이리처럼 사막을 달리고
초승달이 뜬 밤에는 들개처럼 거리를 헤맸다.
그렇게 여행하던 어느 날, 문득 이슬람의 도상학이 머리에 떠올랐다.
6장 동양의 재즈가 들린다―캘커타
갈증의 거리에서 비 내리는 거리로.
우기가 한창인 어느 날 밤, 캘커타의 번화가에서 작은 도깨비불을 만났다.
그 불은 천천히 거리를 유랑했다.
나는 그 기묘한 불빛을 어느 낡은 건물 옥상에서 창녀들과 함께 바라보았다.
7장 심산―티베트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노승은 옆으로 누운 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승려의 안광을 사진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승려와의 결별을 뜻하고 있었다.
8장 황금빛 최면술―버마
인간은 황금빛 탑 아래의 일곱 개 별들 중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지구라는 사바세계를
잠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웬일인지 칠요七曜에는 지구가 없으니까.
9장 잡초에 덮인 유곽―치앙마이
……그날 밤 정액이 강을 향해 흘러갔다.
어둠의 늪에서 희미한 분홍색 연꽃 봉오리가 보였다……. 문득 그 어둠 속의 꽃봉오리가 부모를 잃은 영아의 변환變幻은 아닐까, 생각했다.
10장 신이 없는 카테드랄―상하이
덩치가 큰 남자는 두 손으로 간신히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을 품고 있었다.
큰소리를 지르며 그 돌을 몇 번씩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있다.
나는 그 땅바닥을 보고 아연해했다. ‘게’다, 저 상하이 게의 참극이다.
11장 보름달이 뜬 바다의 둥근 돼지―홍콩
……걱정하지 마, 저게 홍콩의 등불이야! 나는 큰소리로 고함을 쳤어.
동생은 어두운 바닷속에서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훌쩍거리며 울었다.
역시 흥분한 모양이군. 좋아! 저 불빛 아래서 큰 부자가 될 거야……
열심히 헤엄쳤어.
12장 주홍빛 꽃·검은 눈―한반도
시베리아 한랭기단이 뒤덮은 이국에서의 하룻밤,
낯선 거리에서 여자의 월경을 목도하던 중
여자의 어깨 너머로 검은 눈雪을 보았다. 새벽녘의 파란 미광이 하늘에 반사되어 그림자를 갖게 된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13장. 여행은 사상이다―고야산·도쿄
이런 것을 보고 바람에 날리는 눈이라고 하는구나…….
마치 하나하나가 관음처럼 빛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저 관음은 우리의 관음이 아닌지도 모르겠군…….
옮긴이의 글
동양기행
후지와라 신야
304p



<인도방랑> <티베트방랑>의 작가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에세이집. 제23회 마이니치 예술상을 수상했다. 1980년에서 1981년 사이 400일이 넘는 기간동안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중근동,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홍콩, 서울을 지나 일본의 한 순례지에서 마친 여행기를 담았다. 특히 한국의 1980년대 초반의 겨울, 김이 피어오르는 서울거리의 모습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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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방랑> <티베트방랑>의 작가, 후지와라 신야의 대표적 여행에세이
왜 일본의 젊은 여행자들은 이 책을 가슴에 품고 떠나는가!
제23회 마이니치 예술상 수상작
“삶의 온도가 빙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그렇게 동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스탄불, 시리아, 파키스탄, 캘커타, 티베트, 미얀마, 태국, 상하이, 홍콩, 서울, 일본.
동양의 저 구불거리는 거리, 냄새, 풍경, 인간 속으로 떠난 영혼의 여행기!
현재 일본에서 수십년간 ‘특급 작가’로 대접받고 있는 사진가가 있다.
1969년 여름, ‘살아 있다는 감각을 찾기 위해’ 카메라 한 대만 들고 인도로 떠났고, 난생 처음 사진을 찍었다. 몇 년 후 발표한 여행에세이 <인도방랑> <티베트방랑>등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여행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바 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에 출간된 바 있는 이 책들은 지금은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나 찾을 수 있는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 진가를 알아챈 일군의 독자들로부터 “이제껏 읽어본 많은 기행서적 중 최고로 꼽는 책. 여행에 대한 균형감 있는 시각과 깊이 있는 인생의 성찰. 여행에 대한 환상이나 흥미 위주의 에피소드로 가득 찬 요즘의 여행책들과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진, 진정한 여행의 가치를 표현한 작가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의 이름은 후지와라 신야.
청어람미디어의 신간 (전2권)은 그의 동양여행기 3부작(인도방랑/티베트방랑/동양기행) 중 최고 결정판(제23회 마이니치 예술상 수상작)이다. 1980년에서 1981년 사이 4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중근동,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홍콩, 서울을 지나 일본의 한 순례지에서 동양방랑의 고단한 여행을 마친다.
무려 30년 전의 여행기지만, ‘하나의 재능을 만났다’는 힘을 느끼게 하는 저작으로, 특히 한국독자들로서는 1980년대 초반의 겨울, 김이 피어오르는 서울거리의 모습이 아득하게 와 닿는다. 저자는 서울의 겨울과 판소리를 더듬으며 마치 김승옥의 단편을 읽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이후에도 저자는 수십년간의 여행(이력에는 ‘방랑’으로 표기한다)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명과 사람들을 기록하고, 인간 존재와 현대사회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사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카메라로 쓴 시집, 이것이 진정한 여행사진이다
그가 찍은 여러 사진들은 이국의 전형적이고 미화된 사진 부류와는 완전히 다르다.(사진가들 사이에서 그의 사진에 대한 아마추어/엉터리사진 논쟁이 한때 뜨거웠다. 미대 중퇴라는 경력답게 특이한 사진법과 미적 감각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국적 풍광과 화려함 대신 화장당해 불타고 있는 시체, 떠돌이 개(‘인간은 개에게 먹힐 만큼 자유롭다’), 거칠고 황량한 사막, 시장(‘시장이 있다면, 국가는 필요없다’), 거리에 버려진 생명 있는 것들(‘병원에서는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죽음은 병이 아니기에’)(, 환락가에서 먹고 살고 울고 웃는 인간군상(‘인간은 고깃덩어리예요. 감정이 제일 중요해……’), 내세의 풍경과도 같은 시골마을(‘이런 곳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풍경이, 일순 눈앞에 펼쳐질 때가 있다’) 등 수많은 원풍경의 이미지들을 찍었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 성과 속이 교차하는 인간 그 자체의 존재와 자연의 생로병사 드라마를 담아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보노라면 묘한 ‘신기神氣’가 느껴진다.
사진의 캡션과 본문의 텍스트 역시 탁월한 수준으로 이름 높아, 감상문과 일상의 에피소드가 대부분인 최근의 여타 여행서들과는 분명한 차별점을 가진다. 혹자는 그의 사진과 캡션을 하나로 합쳐 ‘하나의 시집’ ‘인문학적 사진철학’에 비견하기도 한다.
무감각한 ‘삶의 빙점’에 이르렀을 때 방랑한, 인간의 영혼이 떠도는 동양의 거리!
1960년대 이후 일본은 이미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경제성장을 자랑하고 있었다. 본궤도에 들어선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고도성장 시스템에서 벗어나 후지와라 신야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응시하기를 원했고, 박제화 되어가는 최첨단 현대사회의 표상인 일본을 떠났다. 그리고 청년시절 이후, 20여 년 넘게 동양과 서양의 거리를 ‘방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질과 문명 너머에서 우리 인간들이 잃어가고 있는 뜨거움과 그 자체의 생명력을 보았다. 특히 인도와 동양이 그러했다.
이미 일상과 무기력함에 마비되어 ‘삶의 온도가 빙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그는 ‘그렇게 동양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시작한 후 십년 째가 되었을 때 내게도 ‘여행의 빙점’이 찾아왔다. 얼어붙은 정신으로 무의미한 여행을 반복하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생물들이 귀찮기만 하다. 특히 인간은 더욱 그렇다. 인간을 피해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이 시기에 내가 찍은 사진과 문장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에게 흥미를 잃었다는 것은 ‘쇠약’해졌음을 뜻한다. 나는 기사회생의 여행길에 나섰다. 얼어붙은 나의 여행길을 또다른 여행을 통해 녹여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동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 변두리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승려까지 모든 인간과 사귀기로 작정했다. 여행 중반쯤 캘커타에 당도할 무렵, 나는 갑자기 회생했다고 생각했다. 얼어붙은 여행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되찾았다.” -<2권 여행의 빙점, 300쪽>
“창밖을 바라보면서 동양이라는 곳을 생각했다. 온갖 냄새들이 코에 달라붙는다. 이것이 동양의 냄새였던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에게 해, 다시 마르마라 해를 따라 기차로 약 40시간, 동양이 시작되는 이스탄불이 가까워질수록 바로 이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물건이 무르익고, 썩어지고, 그것이 거리를 이루고, 또는 발효되어 대지의 향기처럼 발산하고, 마침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저 뻔뻔스러운 냄새. 이것이 동양의 냄새였던가.”-<1권 겨울해협-이스탄불, 45쪽>
“동양인들의 삶은 개인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삶은 길가에 버려져 있다. 집집마다 대문이 열려 있다. 개인적이어야 할 공간이 사람들 면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8년 전 캘커타를 방문했을 때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어느 가정집을 지나가다가 출산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나는 그래서 동양을 사랑한다. 몇 년 전부터 나와 똑같은 혈액이 물결치는 동양의 자태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분명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좋아하는 부분만 선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장면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것. 선악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뒤섞여 있는 그 거리에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1권 겨울해협-이스탄불, 49쪽>
이렇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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