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의 형식을 빌린
너무나 기발하고 코믹한 소설!
정통 세계문학을 지향하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의 열일곱 번째 권으로 출간되는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1996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처럼 최신 작품이 전집에 포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둘째로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라는, 전혀 소설 같지 않은 제목이다. 이 보르헤스풍의 책은 제목만 보아서는 연구서나 자료집 같아 보이며, 실제로 작가 사전과 같은 외양을 띠고 있고 말미에 그럴 듯한 문헌 목록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나 내용은 완전한 허구이다. 셋째로 “아메리카”와 “나치”라는,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다. 2차 대전의 참화에서 벗어나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더구나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집필되는 나치 문학은, 유럽에서와 같은 역사적 맥락이나 현실성조차 갖지 못한, 순전한 공상과 노력의 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수십년간 군사독재를 경험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들 가상의 극우 작가들의 행적은, 코믹하고 경쾌한 서술과는 별도로, 음울한 음조를 띠게 된다.
히틀러를 사랑한 극우 작가 30명
그들의 행적을 사전 형식으로 서술한 블랙 유머 소설
이 책은 백과사전의 형식을 빌어 가상의 아메리카 극우 작가 30명의 삶과 작품 세계를 해설하고 있는 블랙 유머 소설이다. 아르헨티나 작가가 여덞 명이고 미국 작가도 일곱 명이나 된다. 부르주아 귀부인, 뒷골목 인생, 축구 서포터, 게임 제작자, 심지어 흑인까지 포함된 이들 아리안주의자들은 2차 대전 이후의 현실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며 실존 인물들과 교통한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 아돌프 히틀러와 찍은 기념 사진을 간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추근거리는 동성애자 앨런 긴즈버그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한다. 재능을 가진 사람도 몇 명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경찰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50명이 읽을까 말까 한 시와 소설을 쓰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죽는다. 이들의 허망한 삶과 아무 가치도 없는 작품들은 문학이라는 꿈의 세계에 잘못 발을 들여놓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애도처럼 읽힌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볼라뇨의 이름을 스페인어권 세계에 알리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다. 허구적으로 창조된 이들 극우 작가들은 1회용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볼라뇨의 세계의 한 축을 구성하면서 그의 여러 작품에 되풀이 등장한다. 작가 사전에 어울리지만 종종 폭소를 유발하는 담담하고 아이러니한 문체는 시종 잘 유지되는데 이것은 작가(볼라뇨)와 대상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 리스트의 마지막 인물 라미레스 호프만에 이르면 볼라뇨는 주변 인물로 자신을 등장시키며 라미레스 호프만의 운명에 개입한다. 이런 갑작스런 톤의 변화는 독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작가가 더 이상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작가의 원체험이라 할 피노체트 쿠데타가 여기서 관련되기 때문이다. 작가 사전처럼 시작했던 이 책은 기묘하게도 드라마틱하게 끝난다. 이어지는 <괴물들을 위한 에필로그>는 사전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 출판사, 잡지, 단행본들을 해설한 것으로, 그 자체로 위트 있게 쓰여 있기도 하거니와, 본문과 참조해서 읽는다면 몇 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미레스의 이야기는 볼라뇨의 다른 소설 <멀리 있는 별>(1996)에서 좀 더 확장되어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