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 무대에 서다

안희제 and 5 others · Essay/Humanities/Social Science
3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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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건강세계의 시민권을 욕망하며 좌절하기보다는 건강을 재단당하지 않으며 질병세계에서 동료 시민들과 어울려 살길 바란다.” 2만 명 이상 관객들이 뜨겁게 호응한 2020년 화제의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가 2022년 책 《아픈 몸, 무대에 서다》로 그 여정을 이어간다. 기획자 조한진희가 선언한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연극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단언하는 건강중심사회에 다른 몸과 삶의 가능성을 펼쳐 보였다. 여러 대중과 언론이 여기에 화답했고, 사회 곳곳의 아픈 몸들이 연극을 통해 자신의 몸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아픈 몸의 소수자들은 난민과 같은 존재다. 의료권력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이들은 사회 밖으로 추방되거나 소외, 배제된다. 이들이 아픈 몸을 회복하지 않아도 온전한 삶을 꾸릴 수 있으려면 질병을 발화하는 언어가 훨씬 더 풍부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패, 절망, 고통의 말로 납작하게 포장된 질병의 이면”을 더 많이 들추는 일이다. 여섯 명의 시민배우들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무대에서 펼쳐냈던 자신의 몸/질병 경험에 대한 사유를 끈질기게 이어나갔고, 아픈 몸을 고립시키고 완치라는 허상을 강요하는 이 사회가 어떻게 한 사람의 욕망과 꿈, 일상을 박탈하는지 글로서 생생히 증언했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아픈 몸의 동료’들과 긴밀히 호흡하며 삶과 질병, 슬픔과 기억, 사랑과 고통에 대한 각자의 진실을 한층 더 단단히 벼려내는 과정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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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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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연극과 책에 쏟아진 찬사 4 기획의 말 • 조한진희 12 배우 소개 34 1막 조명이 켜지기 전 여섯 개의 창들, 나의 첫 관객 • 홍수영 38 ‘쓰고 있고, 쓸 수 있는’ 서사 • 나드 47 석연치 않고,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 다리아 63 나의 일상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 쟤 71 억눌렀던 슬픔이 처음 몸 바깥으로 흘러나올 때 • 안희제 83 첫 봄비 바다를 두드리는 날에는 • 박목우 93 2막 막이 오르고 거울 안에는 가만히 내려앉은 평화가 당신의 얼굴처럼 비춰들고 • 박목우 108 당신의 악역 • 안희제 122 세심한 존중의 무대 만들기 • 쟤 139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 다리아 155 시선들 • 홍수영 168 우리의 삶이 연극이 될 때 • 나드 181 3막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춤추는 삶이 될 때까지 • 나드 210 다시 글을 쓰기로 하며 • 다리아 227 아파도 미안하지 않은 연극 • 안희제 236 모두를 위한 일터는 가능할까 • 쟤 249 싸늘함 속에서도 나는 보았지, 번져가는 꿈결을 • 박목우 264 일상을 건넬 이들의 존재 • 홍수영 276 부록 대본 290 연극 제작기 • 조한진희 326 시민연극〈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가 걸어온 길 338

Description

‘아픈 몸’들이 마이크를 쥘 때 세상은 변한다 2만 명 관객들과 뜨겁게 호흡한 화제의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끝나지 않은 여정 ‘완치’라는 허상을 깨고 ‘아픈 몸’의 동료들을 찾아 나선 여섯 배우들이 생생히 써내려간 질병 그리고 연결의 경험 선언 하나: 의심과 몰이해에 맞서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 참여한 여섯 명의 시민배우들은 각기 다른 아픈 몸을 가지고 있다. 병명도 증상도 천차만별이지만, 이들은 종종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언제 어디에서나 의구심이 이들의 몸을 둘러싼다. 수영은 근육병으로 인한 경련 때문에 얼굴 표정과 움직임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몸이 좋지 않은 날 더 많이 웃게 된다. 입꼬리나 눈 주변 근육을 통제할 수 없어서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는 웃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영의 표정과 감정을 너무도 손쉽게 동일시하고, 그를 오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며 떠나간다. 무지한 건 사람들인데, 그 무지 때문에 수영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얼굴 하나, 표정 하나를 갖고 싶어서 헤맸던 시간들. 경련이 웃음으로 변하고, 그 어떤 웃음도 내 것이 아니었던 시간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나갔다. 나를 스치듯이 보고 스치듯이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 수영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누군가 어색한 악수 대신 이런 말을 건넬 때다. “우리 내일 만날래요?” “다음 주에 또 볼까요?” 크론병과 살고 있는 대학생 희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증세 때문에 학교에 병결 신청을 하는 일이 잦은 그는 겉보기에 멀쩡하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는다. 교수나 조교, 친구들에게 자신의 몸에 대해 설명하고 또 설명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그는 “건강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기랑 비슷한데 자꾸 아프다고 하고, 장애인들이 보기에는 불편해 보이지 않는데 자꾸 힘들다고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평생 질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몰이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통증’이 된다. 이 통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단 하나, “우리 사회의 다수가 다양한 질병서사에 노출되고, 다른 아픈 몸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현대의학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희제는 몸의 증세에 따라 다양한 의료과를 전전하지만, 의사들은 오진을 거듭하고 다른 과에 책임을 전가할 뿐이다. 그럼에도 의학은 스스로의 오류와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환자의 몸을 ‘오류’로 만든다. 그 오만함에 대해 희제는 이렇게 일갈한다. “내 두통조차 설명 못하고, 팔에 생긴 염증 하나에 쩔쩔매면서 자신은 틀렸을 리 없고 내 몸이 특이하다고 말하는 뻔뻔함. 의학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제 발이 진료과들 사이를 헤맨 이유는 의사들의 혼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헤맨 건 내가 아니라 의학이죠. 의학이 완벽하다는 착각을 버릴 때, 비로소 의학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선언 둘: 낙인과 추방, 도구화에 맞서 한편 어떤 몸은 그 존재 자체를 철저히 부정당한다. 이런 몸들은 사회 밖으로 추방된다. 20년 넘게 조현병과 살며 환청을 듣는 목우의 존재를 사회는 손쉽게 삭제하려 한다. 환청은 목우 자신에게는 ‘실재’하는 소리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정상’의 증표로 강제입원과 약물치료의 근거가 된다. 현대 정신의학이 볼 때 환청은 약물로 제거해야 할 위험한 목소리일 따름이다. 결국 반복된 강제입원과 그를 부끄러워하는 가족들의 태도에 목우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입게 된다. 목우는 자신의 몸, 즉 “잠이 쏟아져 간단한 문서 작성을 할 수도 없고, 강박 때문에 몸을 움직여 물건을 정리할 수도 없고, 설거지조차 물소리가 말을 거는 환청으로 들려 할 수 없는 그런 몸들”이 갖는 의미를 사회에 나와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몸들이 “쓸모없는 몸으로 버려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쓰레기로 분류되어 시설에 수용”되거나 가족에게조차 무시와 침묵을 당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연극 무대에서 그는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던 내 마음”이라고 환청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긍정한다. 오랜 세월 자신에게 ‘비정상인’의 낙인을 씌웠던 환청에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그 낙인을 넘어선 순간이었다. 목우가 덧붙인 정의는 환청에 대한 전복적 해석이자 현대 정신의학과 의료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다리아의 경우, 자신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몸의 특정 기능으로 환원/도구화되는 폭력을 겪었다. 난소낭종으로 수술을 받았던 그는 자신의 질병 회복을 바라는 가족들의 마음 한켠에 ‘시댁’에 ‘손주’를 안겨주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절망하고 분노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몸(자궁)을 출산을 위한 도구로 간주한다. 즉 “다리아의 자궁 건강은 그 자신을 위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손주를 안겨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된다. 이처럼 대상화된 몸들은 특정 기능(출산)을 수행해야만 사회적으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며,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다리아는 연극 무대에서 이렇게 외침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지우고 자신을 출산을 위한 ‘자궁’과 동일시하는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의지를 표명했다. “내 몸은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인력을 생산하는 출산 도구가 아니에요. 그러니 모두들! 내 난소를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선언 셋: 지금의 삶을 잠식하는 것들에 맞서 나드와 쟤의 이야기는 질병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단지 ‘사망하지 않음’ 그 이상의 의미임을 보여준다. 완치 혹은 실패라는 이분법 사이에 무수히 다양한 삶과 일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사회는 보려 하지 않는다. 발병부터 재활, 재발로 이어지는 나드의 20년 세월에서 우리는 질병에 점유되지 않고 삶의 주체성을 끈질기게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 가능한지 생생히 보게 된다. 나드는 두 번이나 수술했던 턱관절이 재발하며 대학원 생활과 유학·취직에 대한 꿈은 물론 친구들과 놀러가는 평범한 일상도 모두 접어야 했다. 수시로 밀려오는 통증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들이 수년간 계속되었다. 몸 때문에 마음까지 병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으면서도 자신이 “어떤 성취의 계단에도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아프기 전의 몸을 되찾는다는 목표 이외의 것들은 모두 미래에 저당잡힌 채 삶은 질병에 점유되었던 시간들. 연극을 통해 나드는 그 시간들을 뒤로하고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아픈 몸으로 ‘현재’를 살기로 결심한다. ‘질병을 극복한 건강한 몸’에 대한 사회적 압박과 치유에 대한 집착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아픈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사람의 책임은 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완치란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압박 속에 더 이상 스스로를 가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는 이제,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원합니다.” 4기 유방암 생존자로 살아가는 쟤는 유방 절제 수술 이후 비교적 안정된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와 무관하게 겪어야 하는 금전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치료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사회제도 탓이다. 그에게 암보다 무서운 것은 ‘가난’이다. 집중 치료가 끝난 뒤에도 경구용 항호르몬제 및 항암제(대부분 비급여 항목에 해당한다) 처방과 이에 필요한 검사 때문에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암 환자를 위한 국가와 지자체 지원금 또한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 같은 초기 집중 치료에 모든 지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해 노동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픈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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