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를 향한 긴급 제동! 지금 바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사회를 향해 거침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철학·사상가 우치다 타츠루가 다시 한번 파문을 일으켰다. 이 책은 우치다 타츠루를 비롯해 일본 사회의 지성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겪으며 함께 쓴 앤솔러지 기획으로 완성됐다. 『한 걸음 뒤의 세상』은 ‘후퇴’에서 찾은 생존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만큼 ‘후퇴론’ 또는 ‘후퇴학’을 다룬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그 이전부터 이른바 ‘잃어버린 10년(또는 20년, 지금은 30년이라고 부름)’이라는 저성장의 장기 디플레이션 국면을 거치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전후 사회를 지배한 ‘평화와 번영’ 체제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일본대지진은 억지로 끌어온 평화와 번영 체제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다. 그 후에 집권한 아베 정권은 아베노믹스에서 일본의 성장 동력을 찾으려 했지만, 동시에 국수주의와 배외주의를 표면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로써 일본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또한 최근 일본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문제가 겹치면서 일본은 쇠락 일로에 들어섰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의 약진으로 일본은 경제 대국이라는 위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일본 쇠락의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무리하게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만국박람회(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일본의 재도약이나 경제 성장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후 부흥 시절에나 통했던 과거 방식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로 세계 산업 지형도가 바뀌었고, 글로벌 금융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경제 구도, 기후 위기 여기에 AI의 등장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사회의 도래를 앞두는 시점에서 과거에 매달리는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책에서 국력이 쇠퇴하고 보유한 국민자원이 감소하는 지금이야말로 ‘후퇴’는 긴급한 의제라고 소리 높인다. 하지만 후퇴라고 해서 철수나 도망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치다가 말하는 후퇴는, 국력이 쇠퇴하는 현실에 적절하게 대응해 연착륙하자는 의미로 위기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 집중,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개발 성장, 지구 환경 위기로부터 후퇴할 때가 됐다!
『한 걸음 뒤의 세상』은 일본 지성 16인이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전문가적 관점으로 본 일본 사회의 후퇴론을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제1장에서는 현재를 역사의 분기점으로 상정하고 왜 지금 후퇴론이 필요한지를 말한다. 우치다 타츠루를 비롯해 정치사상가 홋타 신고로,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세계적 석학 사이토 고헤이, 『영속패전론』과 『사쿠라 진다』 등으로 일본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린 ‘패전의 부인’ 의식을 파헤쳤던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의 날카롭고 선명한 글이 돋보인다.
특히 홋타 신고로는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다음 처방전 마련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그동안의 처방이 왜 효과가 없었는지 그 매커니즘을 밝히면서 재앙을 맞기 전 삶의 방향 전환을 이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후퇴학의 목표라고 강조한다. 또한 우치다 타츠루는 현재 일본의 최대 위기는 인구감소와 지역소멸이라면서 놀랍게도 일본 지배층은 인구감소를 제2의 인클로저(울타리 치기) 기회로 본다고 말한다. 더불어 사이토 고헤는 오로지 경제 성장만을 바라보며 미지의 시장을 개척해 온 자본주의는 커다란 한계에 봉착했다면서 지금 당장 망설임 없이 후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퇴란 위기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로 시스템 변화를 꾀하는 혁며 같은 전진이라는 것이다.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 정치도 참담하지만 그것보다 문제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력에 투표하는 유권자의 무지가 우려스럽다며 그동안 일본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다. 이슬람 법학자 나카타 고는 일본 쇠락은 일본의 독자적 현상이지만 국수주의화와 전체주의화는 세계적 경향이라면서 일본 진보 세력이 왜 계속 패배하는지 그 원인을 밝히면서 일본 쇠락의 원인을 관료 사회의 무사안일주의에 있다고 쓴소리를 내뱉는다.
제2장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이뤄져야 하는 ‘후퇴’의 여러 모습을 이야기한다. 특히 코로나19 사태가 불러온 세계적 위기 속에서 일본 사회에 드러난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 감명병 전문가 이와타 겐타로를 시작으로 도시에서 산골 마을로 이주해 인터넷 라디오와 인문계 사설 도서관을 운영하는 아오키 신페이,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일본의 작은 해안 마을로 이주한 다큐멘터리 감독 소다 가즈히로, 록밴드 ‘아시안 쿵푸 제네레이션’의 보컬리스트 고토 마사후미의 흥미로운 후퇴론이 실려 있다. 또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와 『천연균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로 국내에 잘 알려진 시골빵집 타루마리를 운영하는 와타나베 부부의 후퇴론이 눈길을 끈다. 그간 발간한 책에서는 알 수 없었던 부부의 도시에서의 후퇴 이야기에 주목할 만하다.
제3장은 후퇴를 위한 패러다임 전환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일본을 대표하는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와 생명과학자 나카노 도오루, 역학자 미사고 지즈루, 의료경제학자 유병광 그리고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히라카와 가쓰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특히 히라타 오리자는 일본 문학의 예를 들면서 과연 일본 사회가 냉철한 후퇴전을 과연 치를 수 있을지 지적하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재생을 위한 플랜B』로 주목받는 의료경제학자 유병광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재일교포 출신이지만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 종사했던 의사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일본 재생 플랜B는 그대로 한국 재생 플랜B로 대치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포스트 자본주의, 탈성장으로
후퇴가 완성되는 곳, 커먼즈와 로컬의 발견
최근 한국도 인구감소와 지역소멸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한국의 출생율은 세계 최저로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수치를 나날이 갱신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사상 처음으로 전국의 인구소멸 지역 82곳을 지정 고시하고 지역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또한 청년의 지역 이주를 지원하는 많은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한 걸음 뒤의 세상』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단초를 제공한다. 문제는 ‘성장’을 상정한 지역 활성화 정책에 있다. 이미 우치다 타츠루는 전작 『로컬로 턴』에서 성장의 종언을 말하며 탈성장과 포스트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로컬리즘을 제안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말하는 후퇴의 완성지는 결국 로컬과 커먼즈이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후퇴는 포기가 아니다. 와타나베 이타루가 말했듯이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이기도 하지만, 소다 가즈히로가 말하는 ‘순환의 시간’으로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후퇴는 우리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미래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