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시인은 이 세상에는 없는 새로운 세계를 다채롭게 펼쳐보인다.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어서 언어가 만들어내고 있는 이미지라기보다는 실재를 보고 겪는 듯하다. 이는 곧 언어의 확장과 우리 삶의 확장으로, 이 시집은 세상의 풍요로움과 언어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시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해설]
눈/깃털/바다/별/바이러스, 그리고 활자로 내리다·김영옥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수면(睡眠)” 속에 빠져들면 마주치게 되는 몸 속 “수면(水面)의 창”에 떠오르는 단란한 가족. 폭풍우 끝난 밤, 밥상을 둘러싸고 달 아기들과 달 어머니가 둥글게 앉아 있다. 달 어머니 국자마다 달덩이 퍼올리신다. 이 집은 일차적으로 “문을 닫아도 달 냄새 멀리까지 퍼지고, 꿈 냄새 요란한 여자의 집”(이하 필자의 강조는 굵은 명조체)이다.
달 엄마와 모든 엄마들은 엄마의 존재를 공유하고 있다. 김혜순에게서 엄마를 엄마이게 하는 그 첫번째 속성은 무엇이든 품어주고 부화시킨다는 데 있다. 엄마는 생산 공장이고 스스로 샘이다. 잠에서 꿈이 부화되고 알에서 새들이 부화되고, 보리밭에서 보리가 부화하고, 그리고 머지않아 ‘별들’도 부화될 것이다. 여성 화자인 ‘나’는 엄마와 이 ‘엄마의 속성’을 공유한다-“또 엄마인 내가 차가운 별들을 가득 품고 있어요”(「엄마는 깃털 샘인가 봐요」). 달, 엄마, 깃털, 꿈, 샘, 별-이 모든 것들은 하얗고 가벼우며,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에 스며들게 하고, 다른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엄마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종종 잊혀지거나, 언급되지 않거나, 함께 공존하더라도 야릇한 모습으로 공존한다. 자, 다시 한 번 수면(睡眠) 아래로 침잠해 들어가 수면(水面) 창에 떠오르는 가족의 모습을 눈여겨보자. 거기에선 “우리 아버진 바다 깊이 잠들어 계시고//우리 어머닌 한 천 년째 바다를 휘젓고 계시다.” 어머니 휘젓는 손길마다 파도의 물방울마다에 아가의 영롱한 눈망울이 맺힌다. 그러면 “아버지 배꼽에선 연꽃 한 그루 억세게 높이 자라/그 연꽃 속에서 뛰어나온 청년이/바다 위 마을의 집집마다/영롱한 눈망울 두 개씩 배달 나간다.” 사람들은 남자에게도 배꼽이 있다는 사실을 꽤나 자주 잊고 지낸다. 배꼽티를 입는 것도 여자 아이들이고, 배꼽 빠지게 웃는 사람들도 사실 대부분 여자(아이)들이지 않던가. 그런데 김혜순은 아버지에게 배꼽을 돌려주었다. 그것도 그냥 배꼽이 아니라, “연꽃 한 그루 억세게 높이 자라”는, “그 연꽃 속에서 청년이” 뛰어나오는 그런 배꼽을.
‘배꼽-옴팔루스Omphalus’는 ‘남근-팔루스Phallus’와 음성적 친연 관계에 놓여 있다. 팔루스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에게만 있는 신체 기관인데, 오만하게도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상징 질서 체계의 초월적 기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면에 옴팔루스는 여자/남자 가릴 것 없이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있는, 인간의 자식임을 증거하는, 즉 탯줄을 끊고 어머니 신체에서 떨어져나왔음을 알리는 삶과 죽음의 족적이다. 배꼽 있는 생명체는 모두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죽음을 담보로, 죽음 속에서의 삶을 살고 있다. 배꼽은 바로 인간의 적나라한 그 실존 방식, ‘죽음 속의 존재’를 늘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뾰족한, 도드라진 무엇’이다. 물론 배꼽의 ‘돌출’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체 안으로 잠겨들어간다. 그러나 기억 속의 배꼽은 여전히 그 첫번째 떨어져나옴의 상흔으로 도드라져 있다. 배꼽은 일종의 ‘마이너스 돌출’이다(이상하다. 라캉이 말했듯이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미지이거나, 자신의 육체을 연장하는 육체이거나 혹은 이제껏 사랑해왔던 존재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의 특징을 지니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어찌 되었든 배꼽에 좀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지 않을까. 남자의 배꼽이 ‘엽기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기껏해야 영화 「매트릭스」 정도이다). 김혜순은 아버지의 배꼽에서 연꽃이 자라게 한다. 즉 신체 안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린 배꼽을 다시 밖으로 돋아나오게 할 뿐만 아니라 길게 연장시켜 높이 솟아오르게 한다(연꽃은 배꼽의 연장이니까). 이 아버지는 한국 문학이 알지 못하던 ‘지극히 행복한, 팔루스의 지구를 고단한 어깨에서 내려놓은 옴팔루스’ 아버지이다. 아버지 배꼽에서 자란 연꽃에서 뛰어나온 청년(주의하시라, ‘아들’이 아니다!), 이 청년이 어머니가 만든 눈망울을 배달 나간다. 이 눈망울을 달고 보는 법을 배우는 아기들 눈에 세상은 분명 달리 보일 것이다. 이 눈망울, 이 검은 점에는 자신이 어머니의 탯줄에 매달려 세상에 나온 존재라는 바로 그 유한한 생존 조건에 대한 기억이 일렁거리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존재의 이 결핍에 대한 처절한 절망이 ‘너에게로 흐르고 싶은 천 개의 강’이 되어 또한 함께 넘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이 다시 쓰는 ‘가족 시네마’는 이렇듯 옴팔루스적 자기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환하디환한 이 달의 꿈속에도 악몽은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꿈속에 나타난 달
어머니에게 오줌을 누고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돼지처럼 구석으로 몰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달 아기들은 문밖에서 울고
-「달이 꾸는 꿈」 부분
달의 환한 꿈속에 침입해 들어온 이 악몽의 세계는 어둡고, 오래된 통곡으로 가득 찬 차가운 수족관의 세계이다. 버려진, 죽은 아가들의 울음 소리가 끊이지 않고 무덤들은 거듭 물 속에 잠긴다. 시인은 TV 욕조를 빌려 이 악몽의 세계를 세기말적 유형으로 그려낸다. ‘그녀’는 TV 욕조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있다. 그녀는 일단 이중적 의미에서 TV 욕조에 잠겨 지낸다. 끊임없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녀(모든 것을 상품으로 기호화해버리는 시대에 가장 뛰어난, 가장 ‘사랑받는’ 상품 기호인 여자), 그리고 화면 앞을 떠나지 않는 그녀(상품 기호가 되어 화면을 떠다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주술에 걸린 듯 꼼짝 않고 바라보는 여자). 그러나 진짜 ‘사건은’ 자정 뉴스가 끝난 이후에 ‘일어난다.’
그러나 자정 뉴스가 끝나면 그 뉴스에 이어서
그 뉴스를 견뎌내는 건 바로 그녀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
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
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
나는 이어서 그녀라는 이름의 TV를 들여다보네
푸른 그늘이 용솟음치고, 침묵으로 얼어붙는 수초들
그 사이로 통곡하는 물고기들이 장의사 행렬처럼 떠가네
TV가 끝난 후 이 뇌파 어항의 불빛은 너무 춥고
곧 이어서 흘러나오는 죽은 아가들의 울음 소리
그녀는 절대로 TV 눈꺼풀을 감지 않네
잠을 자는 것도 그녀에겐 일종의 말하기 방식
그녀는 잠속에서도 우는 배역은 싫어
잉크도 종이도 없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TV 욕조 속 미지근한 물 속을
무거운 고개만 이리저리 흔드네
-「물 속에 잠긴 TV」 부분
잠재적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간의 경계를 무차별하게 지워버리는 과도한 영상 매체 시대에 TV 화면에 비추이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홀로그램적 성격을 띠면서 구체적인 윤리적 책임과 결단을 묻는 질문에서 끊임없이 미끌어진다. 인용한 두 연은 이제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그녀”의 잠속을 들여다봄으로써 이것을 문제화한다. 그리고 이때 여자/남자의 젠더가 중요해진다. 인용한 마지막 연에서 그녀의 수면(睡眠) 속 수면(水面) 창에 떠도는 것은 “통곡하는 물고기” “죽은 아가들의 울음 소리,” 비명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얼어붙은 침묵’뿐이다. 이것은 달의 엄마가 꾸는 악몽이고, 환원해서 말하자면 여성들의 실존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