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아르헨티나 근대 문학의 선구자이자 국부로 숭상받는 사르미엔또의 대표작!
1. 라틴 아메리카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에스파냐에 의한 오랜 식민 경험, 군사 정권의 개발 독재와 잔혹한 탄압, 민중의 고난 등으로 점철된 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는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주변부 국가들이 흔히 겪었던 지난한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는 우리에게 여전히 멀고 낯선 나라로 느껴진다. 우리가 아르헨티나에 대해 아는 것은 축구, 탱고, 목축, 대평원, 보르헤스, 에비타 정도일 것이다.
『파꾼도: 문명과 야만(Facundo: Civilizaci?n y Barbarie)』(이하 『파꾼도』)는 1810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이후 전개된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갈등 양상과 그 근원을 후안 파꾼도 끼로가(Juan Facundo Quiroga, 1788~1835)라는 한 인물의 독특한 삶을 중심으로 집요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근현대사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필독 고전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 비평가 로베르또 곤살레스 에체바리아는 “『파꾼도』는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쓴 책들 가운데 장르를 불문하고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평가했는가 하면, 옥스퍼드 엑서터 칼리지의 교수이자 보르헤스 전기의 작가로도 유명한 에드윈 윌리엄슨은 이 작품을 “근대 중남미 문화에서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꼽기도 했다. 그런 만큼 세계 여러 언어로 옮겨져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동안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작품은 아르헨티나의 역사, 사회, 문화, 정치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난한 삶을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2. 투쟁과 망명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작품
『파꾼도』에는 지은이 도밍고 파우스띠노 사르미엔또(Domingo Faustino sarmiento, 1811~1888)의 개인사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사르미엔또의 삶은 한마디로 고국 아르헨티나 공화국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 그 자체였다. 1811년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산후안 주의 한 유서 깊은(그러나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아르헨티나의 낭만주의 시인 에스떼반 에체베리아가 주도하는 ‘5월회’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아르헨티나 근대사의 한복판으로 본격적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827년 연방파를 대표하는 까우디요(지방 호족)인 파꾼도가 산후안을 덮치면서부터다.
이보다 앞서 아르헨티나는 1810년에 리오델라쁠라따(라틴 아메리카가 식민 상태일 때 에스파냐가 만든 네 개의 부왕령 가운데 하나)의 부왕인 발따사르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를 축출함으로써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라쁠라따 강 연안에 있는 여러 주들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자치 정부를 처음으로 선포했다. 이제 아르헨티나는 약 3세기 동안 지속된 에스파냐 식민 통치의 잔재와 삶의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중세적 이념과 단절하고 본격적인 근대 국민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중대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것은 특히 까우디요들이 득세하던 지방보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절박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근대 국민 국가로 나아가기에는 곳곳에 장애물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큰 걸림돌은 독립 이전부터 거의 독자적이고 고립된 삶을 영위해온 각 지방과, 그곳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담당하며 전횡과 폭정을 일삼던 까우디요라는 전근대적 존재들을 들 수 있다. 특히나 독립 이후 중앙 권력이 공백인 상태에서 이들 까우디요는 더욱 독자적인 세력으로 할거했고, 아르헨티나는 결국 지방의 평원으로 기반으로 활동하던 까우디요들 중심의 연방주의 세력(federales)과, 도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중앙 집권주의 세력(unitarios)이 서로 대립함으로써 극도로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1826년 아르헨티나 의회는 리바다비아(Bernardino Rivadavia)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바다비아는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거해 새로운 국가 아르헨티나를 발전시키고 제도화하려고 애쓴 대표적인 중앙 집권주의적 정치가로서, ‘1837년 세대(서구 문명의 세례를 받은 청년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모임. ‘5월회’를 조직해 독재자인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에 저항하기도 했다)’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스또스, 파꾼도, 로뻬스, 이바라 같은 까우디요들은 리바다비아의 정부와 1826년의 헌법을 거부했다. 결국 두 세력 간, 즉 연방주의파와 중앙 집권주의파 간의 내전인 시민전쟁(Civil War)이 일어났다.
시민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르미엔또는 파꾼도를 비롯한 연방주의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중앙 집권주의파 군대에 가담했다. 그러나 연방주의파에 밀려 출구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사르미엔또는 결국 1831년 칠레로 망명해야만 했다. 그는 5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더욱 가혹해진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즉 1835년에 파꾼도가 암살당한 뒤 등장한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 1797?1877)가 중앙 집권주의파를 뿌리 뽑는다는 이름 아래 잔인한 폭정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르미엔또는 1840년에 다시 칠레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파꾼도』는 바로 사르미엔또가 두 번째로 칠레로 망명해 있던 1845년, 칠레 신문인 《엘 쁘로그레소(El Progreso)》(‘진보’라는 뜻)에 연재한 것이다. 그 주요 동기는 로사스 독재 정권의 부당성을 격렬히 비판하고, 나아가 자유주의적 정치, 사회, 역사의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르미엔또는 당시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크게 ‘문명의 야만’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파꾼도, 로사스, 연방주의, 가우초, 까우디요, 에스파냐, 시골, 대평원’ 등을 ‘야만’의 상징으로, ‘유럽, 북미,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 집권주의, 리바다비아 장군, 빠스 장군’ 등을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야만을 대표하는 인물인 파꾼도의 생애를 중심축으로 해서 아르헨티나의 야만성과 후진성의 근원을 심도 있게 고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