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순간의 빛으로 영원의 꿈을 그린 인상주의 화가들과 프랑스로 떠나다 예술과 낭만의 나라 프랑스에서 그림과 사랑에 빠지다 * 인상주의, 세상을 깨우다 - 새로움을 배척하는 구체제에 던지는 도전장,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새로운 예술이 등장하기 전,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것에 설득당하기 전에 위대한 예술가의 발설 자체는 하나의 전조이자 징후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그런 작품이다. 나체의 여성은 옷을 갖춰 입은 점잖은 신사들과 함께 있음에도 수줍은 기색 하나 없다. 오히려 관람객을 빤히 바라본다. 더군다나 파리 시민의 휴식처인 불로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당시 《살롱》전은 아카데믹한 취향을 고수하며 새로운 화법은 일절 배척했다. 마네는 살롱의 화풍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출품하여 수차례 낙선했다. 이에 아예 고전 회화의 모티프를 가져왔는데, 귀족을 닮으려는 부르주아의 취향을 꼬집으려는 심사였다. 마네의 현대적인 기법은 인물의 구도와 배치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에서 철저하게 지켜 왔던 원근감을 무시했다. 아름다움의 정형은 그것이 단순히 되풀이되는 순간부터 아름다움과 멀어진다. 이 그림은 기존의 고전주의를 깨뜨린 동시에 새로운 고전을 탄생시킨 작품이다. - 그들이 파리를 그려야만 했던 이유,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 인상주의는 19세기 파리에서 시작된 미술 사조다. 시대와 그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인상주의보다 적절한 미술 사조는 없을 것이다. 파리는 19세기 중반에 대대적인 도시 개발을 경험했다. 그 결과 중세 때 지어진 낡은 건물들이 신식의 세련된 건물로 대체되었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은 반듯한 대로가 되었다. 덕분에 파리는 근대의 수혜로 치장한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근간에는 급속한 산업 발달이 있다. 부르주아 계층은 생활의 풍요로움을 만끽했고, ‘레저’라 불리는 휴양 문화가 자리 잡았다. 대중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물과 근대의 문화를 향유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신문을 읽고, 기차를 타고, 피아노를 치고, 산책을 나서는 것이 이 시기에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와 〈유럽의 다리〉, 그리고 〈피아노 치는 소녀들〉, 〈트루빌 해변〉,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등의 무수히 많은 작품이 현대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상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 인상주의가 시작된 그림,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 인상주의가 ‘인상주의’로 불리게 된 것은 모네가 출품한 〈인상, 해돋이〉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의 풍자 신문 《르 샤리바리》의 기자 루이 르로이가 모네의 그림을 비꼬면서 “그 인상만큼은 확실하지만 유치한 벽지보다도 못하다”고 혹평했고, 그 덕에 함께 전시에 참가했던 화가들이 몽땅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해 뜰 무렵의 항구를 순간적으로 포착한 모네의 그림이 물감으로 그리다 만 미완성작으로 보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물을 고정불변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실제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그림이란 실내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리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이를테면 이전까지의 사과는 어느 장소에 있건 같은 사과였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같은 사과라도 놓인 장소와 시간에 따라 수십, 수백 개의 다른 사과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인상주의가 세상에 던진 질문이었으며, 이로부터 현대미술의 물꼬가 열렸다. * 인상주의 미술관에 가면 그림들이 말을 한다 - 인상주의 그림의 성지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은 큰 규모에 마음을 훔치는 작품이 여럿이라 한참을 머물게 만든다. 게다가 인상주의가 화가들이 끊임없이 서로의 의견을 구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다른 그림으로 자꾸만 눈이 간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진실한 예술을 함께 이루려는 공감대가 짙게 깔려 있었고, 그렇게 근대미술의 정점에 닿을 수 있었다. 모네와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는 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운 동료 사이였고, 모두 마네를 존경했다. 반면에 세잔과 고갱은 피사로의 제자였지만 앙숙이었다. 드가는 메리 카샛의 지성을 존중했으며, 마네와 모리조는 가족으로 맺어진다. 고흐와 툴루즈-로트렉은 다른 신분이었으나 삶의 궤도가 닮아 가고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 과정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 그림과 함께 나이 들어 가는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은 이름처럼 모네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르모탕은 오랑주리 못지않은 알찬 구성을 자랑한다. 모네 외에도 모리조, 드가, 고갱, 피사로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300여 점이 넘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아담한 규모라 곳곳을 둘러봐도 큰 힘이 들지 않는 신기한 곳이기도 하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은 여러 명의 후원자들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예술을 만인과 나누고자 했던 이들의 애정이 만들어 낸 미술관으로 개인 컬렉터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 작품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매력 만점의 장소다. - 〈수련〉을 위한 미술관 이상의 오랑주리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은 1927년 모네의 〈수련〉을 기증받으면서 개관했다. 그 과정이 곧 오랑주리의 역사다. 모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기념하기 위해 수련을 그린 작품 두 점을 국가에 기증하고자 했다. 당시의 총리이자 모네의 친구기도 했던 클레망소는 큰 규모의 작품을 추가로 의뢰했다. 이에 모네는 “시민에게 공개할 것,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게 할 것,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을 조건으로 8점의 〈수련〉을 기증했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아침 햇살 아래 피어난 수련, 다른 전시실에는 저녁노을 비친 수련이 핀 연못을 감상할 수 있다. 지하 전시실에도 무수한 명작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르누아르, 세잔, 고갱, 피카소,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등의 인상주의부터 후기 인상주의까지 이어지는 컬렉션은 파리에서 오르세 미술관 다음으로 큰 규모다. * 프랑스 곳곳에서 묻어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흔적 - 클로드 모네의 낙원 지베르니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풍경이란 빛과 대기에 의해 수시로 변하는 존재였기에 진실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그에 맞는 장소를 물색했다. 그 꿈을 이룬 거의 유일한 화가가 모네다. 그는 지베르니에서 300여 점의 ‘수련’과 ‘포플러 나무’ 시리즈를 남겼다. 이른바 모네 예술의 결정체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모네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지베르니를 지나칠 때마다 작고 아담한 마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대도시에서의 각박한 생활과 지지부진한 작업에 지쳐 갈수록 이곳에서의 삶을 꿈꾸었다. 모네의 집까지 가는 길은 한적한 프랑스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사소한 모자람도 없다. 과연 까다로운 화가의 영혼을 사로잡을 만하다. 그는 자신의 우주를 지베르니에 옮겨다 두었던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가 무수한 밤을 지새웠던 아를 반 고흐가 고작 2년간 머물렀다는 이유로 아를은 온통 고흐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이곳의 태양 빛을 담은 〈해바라기〉와 〈노란 집〉,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등의 걸작을 남긴 까닭이 크겠지만 ‘반 고흐’라는 한 화가의 고단한 삶이 이곳에서 끝내 비극으로 치달았다는 데 마음이 끌린다. 옛 건물들 사이로 예쁜 골목길이 얼기설기 있는 아기자기한 도시에 어울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