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푸코인가
푸코는 동시대에 대한 현대적 의식을 날카롭게 벼리는 데 기여했다. 우리 시대를 진단한 우리 세대의 철학자 집단 가운데 푸코는 시대정신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비판철학의 적자로 알려진 세계적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는 동시대의 프랑스 사상가들, 특히 미셸 푸코를 끔찍이 싫어했다. 푸코를 ‘소장 보수주의자’라고 격렬히 비난할 정도로. 그렇지만 그랬던 하버마스조차 푸코의 영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에 대한 현대적 의식을 날카롭게 벼리는 데 기여”한 푸코의 사유가 “시대정신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하버마스의 이런 평가는 여전히 옳다. 지난 2007년 ISI Web of Science가 발표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Most cited authors of books in the humanities)가 푸코였으며, 국내의 경우도 지난 2000년 이래 푸코를 직간접적으로 참조한 논문만 469편에 달하니 말이다.
이 책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는 사후 30여 년이 지난 푸코가 왜 이처럼 여전히 ‘동시대의 사상가’일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화제작이다. 지난 1997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처음 선보인 이래로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는 안토니오 네그리, 에티엔 발리바르,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등 현대 정치철학을 주도하는 주요 사상가들의 공공연한·은밀한 참조점이 되어왔지만, 특히 『안전, 영토, 인구』는 (곧 출간될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89년』과 더불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만한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본성과 작동방식을 적나라하게 분석·비판한 강의로 생명관리권력/생명관리정치, 통치성, 자기의 테크놀로지 등 여기서 소개된 일련의 개념은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데 핵심 키워드가 됐기 때문이다. 요컨대 푸코가 『안전, 영토, 인구』에서 제기한 문제가 비단 서구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더불어 이미 일종의 보편적 문제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푸코의 동시대성과 꾸준한 영향력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안전, 영토, 인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자유주의-신자유주의라는 동시대적 화두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 푸코가 현대사를 다룬 흔치 않은 강의라는 점에서 독특하다면, 『안전, 영토, 인구』는 이 자유주의-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주체(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적극적으로 묻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요컨대 『안전, 영토, 인구』는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그 해결책까지 모색하고 있는 강의이다. 실로 오늘날 대량실업, 극심한 빈부격차, 무한경쟁, 그 극복방안으로서의 자기계발과 스펙 쌓기 등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은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런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태를 선뜻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다. 물론 『안전, 영토, 인구』 역시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낳은 현실의 숱한 모순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통치(성)와 대항품행의 숨겨진 역사
푸코에게 통치성의 유형을 분석하는 것은 그 유형에 맞서는 저항(혹은 ‘대항품행’)의 형태를 분석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푸코에 의해서 제안되고 있는 자유주의의 독해는 이 문제를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안전, 영토, 인구』는 그 이전의 강의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그 이후의 강의인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과 더불어 이른바 ‘자유주의-신자유주의 비판’ 3부작을 이룬다. 그동안 푸코 자신의 유언에 따라 공개되지 않다가 1997년부터 잇달아 출간되기 시작한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는 그 어느 것이나 푸코의 사유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자료들이지만, 특히 이 3부작야말로 ‘푸코 르네상스’를 가능케 한 핵심이다. 그 중에서도 앞뒤 강의의 가교 역할을 하는 『안전, 영토, 인구』는 ‘핵심 중의 핵심’으로, 후기 푸코의 숙성된 사유가 집약된 이 책은 그동안 푸코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숱한 오해가 근거 없음을 입증해준다.
오늘날 푸코의 이 3부작이 주목받는 이유는 자유주의-신자유주의가 전혀 색다른 관점에서 분석되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자유주의-신자유주의는 각종 현안에 대한 시장주도적 접근법(사적 기업의 효율성, 자유무역, 시장자유화 등)을 골자로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런 경제학적·정치학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푸코는 자유주의-신자유주의를 인간들에 대한 새로운 예속화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자유주의-신자유주의는 그 안에서 활동하고 살아가는 개인을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비용-수익’이라는 실리주의적 계산(이해관계)을 중심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급변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그로부터 비롯하는 모든 위험부담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로 변형시킨다. 자립을 가능케 할 모든 집단적 조건을 사실상 없애면서 자기관리·자기경영 능력을 보여줄 것을 강요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폭력이자 현실인 셈인데, 자유주의-신자유주의는 이에 순응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이런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목표이다.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가 ‘통치(성)’ 개념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푸코에게 ‘통치(성)’이란 규율권력(『감시와 처벌』)과 생명관리권력(『성의 역사 1: 앎의 의지』)을 종합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통치(성)는 전체화하는 동시에 개별화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통치(성)는 한편으로 개인의 신체를 물리적·공간적으로 분배하고 감시할 뿐만 아니라 몸짓·태도 자체를 변형시키는 규율권력처럼 ‘개체’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수명·장수 등 주민들의 삶/생명에 관여하는 생명관리권력처럼 ‘인간-종’으로서의 인구를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통치(성)는 삶/생명에 관한 통계학적 계산을 통해 인간들을 ‘인구’ 단위로 관리하는 동시에 이들의 행위와 품행에 개입해 인간들을 ‘개인’ 단위로도 관리한다.
통치(성)는 이런 이중의 관리를 통해서 순수한 복종의 원칙, 통일된 행동 유형으로서의 복종, 자기의 의지를 갖지 않으려는 의지 외에 그 어떤 의지도 갖지 않는 주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푸코가 18세기에 확립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권력의 ‘인간에 대한 통치’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통치는 한 개인의 모든 사소한 세부에 침투해 들어와 무한히 계속되는 작용으로서, 그 안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한없이 지속되는 작용으로서의 ‘전면화된 복종의 장’을 구성한다. 기원후 2세기경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사목제도,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위시로 한 16세기의 통치술 담론, 17세기의 중상주의와 관방학(Cameralwissenschaft), 18세기에 확립된 정치경제학과 그에 근거해 등장한 국가이성, 그리고 그 장치로서의 내치(police) 등을 추적하면서 푸코가 최종적으로 발견해낸 이 순수하게 ‘통치당하는 자’의 형상이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인 것이다. 이렇듯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자연스럽게 자유주의-신자유주의적 주체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푸코가 행한 사유의 궤적을 시각화한 『푸코-지도』(ⓒ Thomas Hirschhorn, 2004)
따라서 결국 푸코가 분석한 통치(성)란 경제의 형식(경제적 지식, 욕망, 관리 등)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기술이다. 경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