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카프카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정수
“[성은] 카프카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소설이다.”
― 『뉴욕 타임스』
20세기 가장 문제적 작가이자 독문학의 전환점이라 평가받는 프란츠 카프카.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현대인의 실존적 고통을 농축해 담은 작품 『성』을 선보인다. 대한민국 1세대 독문학자로서 한국펜클럽 번역문학상을 수상했던 강두식 선생의 번역 원고를 새로이 개정했다. 카프카의 작품들 중 ‘가장 매혹적인 소설’(『뉴욕 타임스』),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소설’(『가디언』) 등의 찬사를 받는 『성』은, 낯선 타지에 도착한 토지 측량사 K가 이유도 모른 채 당하는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성’이라는 지고한 존재에 의해 자꾸만 가로막히는 여정을 카프카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엄연히 성의 초청을 받아 험난한 여정 끝에 도착한 마을이건만, 그의 정체와 지위를 보증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토지 측량사라는 그의 신분은 소설이 진행될수록 모호해지며, 그와 관계를 맺는 마을 사람들 역시 의문스럽고 기이하긴 마찬가지다. K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건 성뿐이다. 이제 K는 그 모든 의심과 비난, 피로를 짊어지고 성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카프카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22년, 결핵 증세에 신경쇠약까지 겹친 그는 요양을 위해 체코 슈핀델뮐레에 머물렀으며 이곳에서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전에 쓴 작품 「변신」이나 『소송』에서 주인공이 급작스런 위기를 맞아 좌절하고 비난받는 것처럼 『성』의 주인공 K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 다만 배경은 추운 겨울, 눈으로 온통 하얗게 물든 건물과 성, K의 발길을 족쇄처럼 옥죄는 깊은 눈길이 주를 이루며, K는 성으로 가려는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들과 온갖 규칙에 짓눌려 마치 미로에 갇힌 듯 눈 쌓인 마을을 헤맨다. 다시 말해 『성』은 K라는 인간이 성에 도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은 일종의 기행紀行이며, 다만 여행자가 결코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는, 다다를 수 없는, 다다르기를 끝내 포기하는, 다다른다는 것의 의미를 해체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반의 기행과는 다르다.
“K는 꿈을 희롱하고, 꿈은 K를 희롱했다.” (본문)
진실과 허구의 경계, 시작의 끝의 혼란
뒤틀린 시공간을 무한히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
K의 목표는 성과 접촉해 자신의 신분과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 관리의 연인인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 천대하는 집안과 엮여 성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기도 하고, 그를 시종 관찰하며 어린아이처럼 기이하고 천진한 행동을 반복하는 조수들 때문에 고통받기도 하고,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여관 여주인과 말씨름을 벌이기도 한다. 이들과의 만남은 마치 엎질러진 물처럼 K 앞에 말 그대로 왈칵 쏟아지며 논리와 무논리를 오간다. K는 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통받으면서, 점점 소설이 진행될수록 마치 그들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여하간 이 모든 행동의 이유는 성이지만, K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의 거리는 오히려 멀어지는 듯하다. 성 아랫마을에 도착한 날 밤부터 혼란과 의문에 사로잡힌 K는 잠 한 번 푹 자지 못하며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깊은 피로에 시달린다. 그런 그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외줄을 타며 성으로의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진정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성과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를 뒤흔들고 좌절케 하며 손가락질하는 마을 사람들은 K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아니, K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이렇듯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곧 K가 무한히 맴도는 듯 보이는 마을에서의 여정을 상징하며, 그 여정의 끝에 결국 성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독자들도, 오직 파멸만이 있으리라 비관하는 독자들도 K와 함께 이 미로를 거닐게 된다.
어쩌면 K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고향을 찾는 듯도 보인다. 그가 편히 쉴 수 있는 곳,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사랑하는 여인과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곳,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토지 측량사로서 일할 수 있는 곳은 곧 우리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꿈꾸는 이상理想과 같다. 미완성으로 끝난 이 소설은 사실 카프카가 완결의 마침표를 찍었을 가상의 완성본에서조차 성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카프카가 그리고자 한 것은 성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성으로 가려는 인간의 불안과 고뇌, 계속되는 좌절과 피로, 태생적으로 모호하고 불완전한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성』의 의미를 두고 지금껏 다양한 해석이 나왔지만,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은 아마도 저마다 다르게 성을 이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는 한 사람의 측량사로서,
자그마한 제도 책상 옆에 조용히 앉아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카프카는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며 힘든 직장 생활이나 끝없는 병환에도 불구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그런 그가 아마도 가장 간절히 바랐을 것은 글쓰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육체였을 테다. 카프카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갈망했던 것, 『성』 속 K가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도달하려 했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일면 맞닿는다.
카프카가 『성』의 결말을 어떻게 상상했든 이제 소설은 독자의 손에 내맡겨졌다. 계속 오해받고 이해되고 비틀리고 확장되면서 『성』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갈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카프카 문학은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