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선한 예술과 사랑, 그 앞에 우리들의 고요한 기도가 있다”
고난의 세월 속에서 쌓아 올린 이토록 진실한 문장들
『약이 되는 세월』은 박경리가 작가로 등단한 이후 1970년대 말까지 써 내려간 에세이, 그리고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겪었던 태평양전쟁, 그리고 6․25전쟁을 지나면서 젊음도, 계절도, 고향도 잃어버렸다고 썼다. 가족을 잃고 그 자신도 병고에 시달리면서 “피부에 스며드는 계절의 냉기 속에서” 단지 “생활의 괴로움”을 맛볼 뿐이다. 그에게 주어진 불행을 심화시킨 고독으로 인하여 그는 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독과 불행이라는 공감을 통한 인간상 속에 친밀과 눈물”을 느꼈고 그 순간만큼은 진실했으며, 그 진실이 그를 문학으로 이끌었다. 소설 연재를 시작하면서 마감 시간이 바짝 다가올 때의 공포 속에서도 그는 꽃을 가꾸고 살이 썩어가는 금붕어에 머큐로크롬을 발라준다. 쿠바 사태로 3차 대전의 위기가 촉발했음에도 땅을 사서 땀 흘리며 그 땅을 일구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가 하면, 책가방을 짐 위에 얹고 무거운 수레를 뒤에서 밀어주는 중학생을 보며 그의 선행에 감동해 눈물을 훔친다. 이를 읽고 어찌 박경리의 인간미에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말한다. “우리는 내일의 불행 때문에 오늘을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을 살아야 한다.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작가 박경리의 내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진실한 문장들로 가득한 이 책에서 독자들은 어쩌면 그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미워하지 말자”
한 발씩, 한 발씩 디디고 나아가는 정신 행위이자 창조의 의지
박경리는 「기다리는 불안」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변화를 갈구하면서도 그 변화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에 대해 토로한다. “정류장에서 버스나 합승을 기다리는 불안을 나는 견디지 못한다. 타고 나면 안심하고 마음을 놓지만 기다리는 동안은 참으로 괴롭다. 결국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하나의 상태로 옮겨가는 그 과정이 무서운가 보다.” 초조와 공포, 저주,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미진한 것들은 수시로 발열하고 그는 그것을 “자학을 완전히 탈피 못 한 자아의 미명 속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본다. 그러한 그의 불안과 자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박경리는 여학생 시절에 꽤 많이 사진을 찍었다. 그때가 태평양전쟁 말기여서 학교에서 사진 찍는 것을 금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6.25 전쟁을 겪고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 이후 사진은 죽은 사람에 대한 섬뜩한 감각만을 간직하는 두려운 것이 되었다. 박경리는 「사진과 죽음」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두렵고 징그러운 일이다. 그 두렵고 몸서리치는 생각 때문에 나는 내가 죽는 날까지 없어진 사람들을 망각의 강에다 띄워 보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썼다.
그에게 “회상은 다만 가슴 저리는 허무에 지나지 못한다.” 그 밑바닥엔 아홉 해를 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어린 아들에 대한 처절한 상실감이 자리하고 있다. 아이가 죽은 지 몇 해가 지났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연륜처럼 그의 마음을 더 깊이 싸고돈다. “불우하면 불우한 대로 생각이 나고, 생활이 안정되어 육신이 편해지면 그럴수록 더욱더 생각이 나서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만 보아도 울컥 죽은 아이를 떠올리고 그림을 썩 잘 그리는 딸아이를 보면서 죽은 동생의 그림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는 서글픈 생각을 한다. 남편을 잃은 것도, 아이를 잃은 것도 여름이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면 묵은 상흔들이 그를 괴롭힌다.
<해마다 봄이 오면>에서 박경리는 “자신을 미워한다는 자의식, 다시 말하자면 자학 같은 것, 이 치열한 자학 속에서 나는 나를 가누지 못한 채 한 해, 또 한 해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고 고백한다. 봄이 오면 “나를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나의 자학은 한 발씩, 한 발씩 디디고 나가는 인생에의 계층의 정신 행위”, “보다 적극적인 삶을 위한 부정의 계기”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코 망각도 포기고 아닐 것이며 다만 삶에 대한 의지요, 삶을 위한 탈출”이며, 바로 “창조의 의지”라고 말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 애정 없이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문인들의 권리이자 의무
「어린 비둘기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라」는 박경리가 1960년 4월 24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 쓴 글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이 땅에 피를 흘리고 유명을 달리한 어린 영혼들의 명복을 빌며 지금 시내 각 병원에서 생사경을 방황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처절한 고통 앞에 이 값싼 어른들의 눈물을 뿌린다.”고 쓰고 “마산에서 불과 몇 명의 경관의 처단을 주저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그 실수를 논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정선거라는 기름에다 불을 지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관의 발포였다. 이 나라의 순진한 학생들은 데모로써 호소했지, 결코 시초에 또 먼저 폭력을 자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라고 비통해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아까운 젊음을 내던진 현실”에 방관하고 있는 어른들을 질타했다. 나아가 “문인 중에 피를 흘렸다거나 데모에 참가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반독재(反獨裁)를 규탄하는 필화로써 투옥되었다는 말도 듣지 못하였다.”면서 문인들의 현실 참여를 호소했다. 엄혹한 비상계엄 시국에서 이러한 글을 기고한다는 것은 작가의 생명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박경리는 “문인들도 구름 위에사는 선인이 아닌 이상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인 동시 의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문학”은 존재할 수 없으며, “문인은 문학이라는 작업 속에서 진실하게, 극명하게 인생을 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하는 소녀에게」에서 박경리는 “어쩌면 작가란 가장 강한 세속의 욕망을 희구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고, 그 욕망(自身)을 증오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궁극에는 따뜻한 마음과 모멸에, 눈이 정확한 작품을 마련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사위를, 옥바라지하는 딸을, 천사같이 잠들어 있는 어린 손주를 두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불행하지는 않다고, 박완서가 보낸 편지에 이렇게 답장을 쓴다. “눈이 먼 것 같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뜨거운 핏줄을,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의 뜻을 믿고 있다고.
#박경리 17주기 추모 기획
#다산책방 <박경리 산문선> 출간!
한편 다산책방에서는 2026년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을 준비하며 한국 사회와 문학의 중추를 관통하는 그의 방대한 작품들을 새롭게 출간하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와 장편소설선에 이어 진행하고 있는 이번 기획은 박경리 작가의 산문과 시를 아우르며, 오랫동안 유실되었던 미발표 작품도 포함되었다. 올해 집중적으로 출간되는 <박경리 산문선>은 지난 2023년에 다시 출간된 『일본산고』에 이은 다산책방의 기획 산문선이다. 새롭게 개정된 『약이 되는 세월』은 작가의 육필 원고를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전 판본의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또한 현대의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끔 다듬으면서도 고유한 문장과 표현, 시대를 드러내는 단어들은 그대로 두어 작가의 목소리를 오롯이 전하고자 했다.